금요일, 12월 14, 2007

'언어의 침식'에 대해서

글이나 어떤 사상에 있어서 해체를 말한다고 할 때에 철학자 데리다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일단 글쓰기라는 것으로서 접근해야 함을 주장하고 또한 그 쓰는 '언어의 침식'이라는 것으로 전통적인 사상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말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침식이라는 측면의 입장이 진정 당위성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된 답변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그의 고민은 의미적인 측면에서도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본래성에 대한 해체의 '잘됨'이라는 것의 해체적 당위성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이 마련되지 않는 한 성경에 대한 합리적 해체라는 것의 잘됨의 실존적 해체는 그 자체가 해체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성경의 언어와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기술이면서도 그 본래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에 따른 동일하면서도 다른 범주적 설정에 따른 것으로서, 자존자의 자존적 정당함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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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9월 04, 2007

피랍사태에 대한 비판자들의 언어와 인식에 대하여

피랍자들의 귀환과 함께 여러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어떤 방송국의 보도를 기억하는데..

무성한 여러 비판적인 말들을 주목하여 볼 때에 그 문제는 피랍된 사실과 현상에 대한 임의적 해석에 있다기 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적 인식들이 대부분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용하는 언어들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종교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논리적 언어를 말하고 있고 그러한 언어들의 도단적 입장에서 여론을 의도화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디자인 하는 것같습니다.

종교세라는 입장을 근거로 종교에 대한 간섭적 정당성이 세워진 것으로 아직도 착각하시는분들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종교세라는 개념이 정교의 분립을 말하는 것에서는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는 종교세의 의무적 위반이라는 점에서 더 격양된 기독교 선교의 사고사태에 대한 부담금에 대한 입장이 확고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립은 어거스틴 이후에 좀더 명료해진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정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서방교회의 전통이 되어왔고 종교개혁 이후에 신교의 입장이 되어 왔습니다.

종교세를 말하는 것은 이런 정치 종교의 분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납세의 의무와 함께 참정권의 권리적 행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가 정치적 입장의 선동도 합법적이고 또한 '이익단체'나 '압력단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세도 가지게 되어지고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결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이번 피랍사태에서 본다고 할 때에 오히려 구상권 청구권과 지금의 모든 비난하시는 분들의 입장도 그 입지도 좁아지는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문책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앞으로 모든 정치적 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법적원칙을 생각할 때에, 임의적으로 그러한 관계성을 넘나드는 언어적 표현과 인식들은 법이해의 몰이해와 또한 의도적 여론을 디자인하는 더 나아가서 선동적 입장으로 오히려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리한 여론을 환기시키는 투표도 정치와 종교에 대한 분립적 개념을 상황적 개념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재조정하겠다는 것이며 객관성도 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여론의 환기를 위한 투표라고 하는 것도 전문적인 언어로서의 선교와 그에 따른 사고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여서 실시된다면 그것은 인식의 통계의 표본을 잘못 설정한 것으로 그 결과의 여부라고 하는 것은 어떤 보편적 규정적 역활을 할 수 있는 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전문적 언어와 그에 따른 인식과 사태이해를 요구하는 것을 일반적 측면의 보편의식으로 비로소 판단한다는 자체와 그러한 판단들의 보편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 인식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분되어진 범주적인 인식을 상식적인 개념으로만 접근하고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는 것은 그 보편이라는 것이 규정적 역활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할 수 없습니다. 즉 이해와 인식의 범주가 벗어난 가운데서 여론의 향방을 의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부적절하며 하나의 편견일뿐, 일반적으로 보아도 전문성 있는 악한 의도적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없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개념을 내세우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안다는 개념이 상식적인 측면에 그쳐서 이야기 될 것인지 아니면 전문성을 갖추어야 할 것인지, 기독교와 그 선교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선교에 대한 이해가 되어질 수 있고 또한 국가에 대한 상관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이해와 앎에 대한 전제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적절한 인식의 기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서 알권리를 말한다는 것 또는 의도하도록 한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으로도 납득되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이성적 판단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짐에 있어서 주체적 인식으로서의 문제적 인식을 불러올 수 있는 오류에 대하여서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즉 문제의식을 가지는 인식의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들의 인식이 정당한 것인가, 판단의 당위성이 현실적으로도 헌법적으로도 정당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허용되어진 인식과 언어를 통해 비판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비판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특정 언어와 그 행함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어지는데 그것을 일반 상식적 개념에서 너무 난발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비판적 인식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봅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종교세에 대한 언급이 이미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특정 종교에 대한 안티적 입장에서의 상식적이지 못한 맹목성에서 선례를 두지 않는 대국민서비스의 내용청구와 같은 것은 그 합목적인 측면에서 구상권이라는 법의 실행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이미 범법이나 또는 대국민서비스로서의 부적절함을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앞서 말한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개념에서의 법 이해의 위반되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세를 납부하도록 주장하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립이라는 헌법에 위배되며, 이처럼 의무만 강조하고 권리를 간과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이성을 잃은 자들의 행보인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라고 할 때에는 그 납세의 의무와 정치적 권리에서 자유라는 것도 포함되어지는 것입니다(각주1). 납세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정교의 분립의 법적 원칙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참고 :

피랍사태에 대한 비판의 추이

아프간 피랍자 합동 기자회견 문답







각주 1)물론 이 표현은 세상적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을 언급한 것을 밝혀둡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인간의 통치함의 상관성과 방향성에 대하여서 더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일반 국가 통치적 정치적 입장에 국한되어진 가운데서 논의라는 점에서 국가적 입장에서 종교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언급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재성이라고 함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는 국가의 통치권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그 가운데 합당하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인식의 차이와 인식의 방향의 문제인데, 정치적 실재와 실제의식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와 실제의식으로서의 통치의 개념은 정치적 실제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제개념의 투여와 실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일방성의 당위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적 입장이 상대적인 정치적 실제입장의 실존을 실제적으로 주관함과 정당함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 정치적 개념에서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납세와 권리의 병행적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적 국가임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럽식의 국가관으로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도 역시 앞서 말한 납세와 권리라는 개념으로 한정지을 수 있는 정치적 한계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으로서 납세라는 개념과 그에 따른 요청적 권리요구라는 개념으로 비로소 판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기억할 때에 논의의 필요성이 더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통치라는 측면에서의 한정적 시비라는 측면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납세와 권리의 같이 실존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립적 헙법정신의 한정적 입장을 기억할 때에 납세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은 또는 납세를 강요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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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8월 31, 2007

피랍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보면서

글을 씀에 있어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피랍되어진 사건과 그에 따른 국민들의 마음을 같이해주고 또한 국가의 희생적인 그 외교노력과 그 결실에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감사를 드린다.

그와 같은 고마움과 함께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윤리적 도의적 차원에서 쓴 비판의 목소리까지도 받고자 하는 중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대중을 기만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에 대하여서는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사태파악을 바르게 바라보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서 말한 겸손의 한 일환이라고도 본다.

기독교의 특수성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여론적 입장이 잘못되어지고 있음과 오히려 상식적이지 못하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주장들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 국민으로서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합당하지 못한 인식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검증도 요구되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 후에 여론의 반영이라는 실제적인 행보가 국가적으로나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본인이 볼 때에는 그러한 객관성이 결여되어진 일반 국민으로서의 타당적 인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대두되어지고 있는 언급들에 대하여서 몇가지 점에서 그 인식의 타당성에 대한 사실을 가늠하고 결론적인 측면에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본론

1. 윤리와 도덕과 법에 대하여서..

어떤 사태에 대한 법적 이해와 그에 따른 적용여부를 말함에 있어서, 할 수 있다는 가능태적인 개념으로만 비로소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개념의 관계성에서 종교의 자유라고 함이 있고, 그 법적인 재제의 당위성이 허락되어질 수 있는 것에서 해석과 구체적 법적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라는 것에 있어서의 법적인 허용이 이미 되어진 상태에서 그 의도하지 않는 사고에 대하여 법적 조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물론, 국가의 노력과 국민들의 같이 마음 아파하신 것에 대한 도의적 개념에서 의도되어질 수도 있고, 대국민서비스라는 것에 있어서도 스스로 제한을 받겠다는 도의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고 또한 한 것이지, 대국민서비스라는 것을 받을 수 없는 법적 범죄와 같이 인식하고 그 범죄적 벌금형식으로 부담을 강요하는 것으로써 피랍사고를 범죄로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판단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앞서 여러 인질구출에 대한 전례를 보아도 그런 예는 없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질의 수가 많다는 개념과 국가의 노력이라고 함의 경중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범죄적 개념에서 대국민서비스적 행보를 마땅히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비판하는 대중의 여론을 도모하는 자들의 인식에서는 본의 아닌 사고를 범죄로 말하고 싶어하고 있고 그로인한 대국민서비스를 부정하고 싶어하고 또한 범칙금을 부과하는 형태를 갖추려고 하고 있다.

더욱 교회의 입장에서 사과하는 것은 죄를 범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국민들의 함께 마음을 써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과 고통에 대한 사과인데, 그러한 도의와 예의를 범죄자라는 개념으로 또는 범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은 전혀 일반 이성으로서도 타당성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사고를 범죄로 인식시켜서 법적 아래 놓겠다는 자들의 무분별한 여론몰이에서도 나타고 있다.

어떤 가능성의 합리성에서 진정성으로의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각주 1), 중요한 것은 법이라고 할 때에 해석적 당위성도 중요하지만 이미 기존적 법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법리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함을 생각함이 좋을 것이고 합리적이라고 본다.


2. 신원공개를 요구하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합리적이지 못한 기만적인 것으로써 익명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대국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런 입장을 할 수 있는 대행적 권세가 그에게 비로소 있는지 묻고 싶다. (각주2)



3. 무리한 여론의 행보를 주목하면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지에서 돌아왔다고 하면 기뻐하고 또 그 누구든지 국민으로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다른 인질사태와는 다르게 유독히 비난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있어 보인다는 판단이 상식적으로도 당위성을 얻는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서 특정한 자들의 비방적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는 판단도 따라서 성립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일반 국민으로서의 여론의 진정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러한 여론이 국정에 반영된다는 것도 실제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결론에 즈음해서

하나와 여럿의 문제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즉 종교와 국가의 문제라는 것도 이러한 범주적 이해가 필요한 것인데 그러한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거나 또는 임의적으로 그 논의의 방향성을 바꾸어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대중의 인식을 기만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서 무고한 자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음에 대하여서 그 죄값은 계산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 수용할수 없다고 하여도, 한국에 있는 이슬람 신자들을 국민으로서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이러한 것에 대한 사태에 대하여 범 이슬람의 입장을 재고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구상권을 진정으로 청하고자 한다면, 이슬람권 나라들에게 청구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슬람의 원리주의자들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이슬람권에서는 그것에 대한 구상적 청구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대 세계적인 사과를 해야함이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대 국민적 입장에서 일어나야할 여론의 상식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은 우리 성도들의 순교의 핏값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분노해야 할 대상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여론의 합리적이면서도 당위성이 결여된 모습으로서의 행방을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형태적인 자숙의 형태만 갖추는 것으로서 외식하기보다는, 대국민적 인식의 향방의 바름을 위해 언급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러한 노력이 자숙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범죄가 아닌 사고로 인해 같이 마음 아파하고 희생적으로 노력한 국가에 대한 예의로서의 자숙임을 밝혀둔다.




국가와 온 국민의 노력과 관심을 감사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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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어떤이의 법적처벌이라고 함을 내세운 언급을 보면

제가 전에 글을 썼듯이 아프카니스탄은 회교국가이고 이나라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헌법에 준합니다.

코란에는 이슬람종교인의 개종을 금하고 이슬람국가에서의 선교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경우 사형당합니다.

실제로 이프카니스탄 이슬람 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아프카니스탄 정부에서 체포 사형 시킨일이 있습니다.

법은 속지주의 또는 속인주의 입니다. 즉 외국인이던 자국인이던 그 나라 안에서는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로 기독교를 믿는 것은 뭐라할 수 없으나 선교는 안됩니다. 선교는 아프카니스탄 헌법에 명백히 반하는 범죄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이번 23명의 선교단은 외국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이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자국인,외국인 구별없이 그 나라의 사법체계상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탈레반 테러세력은 그 나라의 사법적 지위를 가진 단체가 아니지만 명백하게 범죄를 저질렀다는건 아프카니스탄 당국의 형사처벌을 받아도 우리로서는 아무런 간섭을 못합니다.

보통은 외국인의 범죄는 형을 받거나 당사국과 협의후 강제추방절차를 밟게 되죠.

이럴땐 우리나라에서 신변을 인도 사법당국에서 처리하게 됩니다.

만일 외국에서 형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나라에서 형을 받지 않는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일사부재리 원칙에서 제외됩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재실형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죠.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번 23명은 아프카니스탄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범죄행위를 저지는 자들이며 죽은 2명은 공소시효가 소멸되고 남은 21명은 범죄자로서 대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답변 : 실정법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실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인식에서 전혀 주관적 당위성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 이것은 종교의 문제로 넘어간다면 그 종교의 문제적 당위성에 따라서 판단되어진 가운데서 실정법의 이해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종교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테러주의자들의 세운 지역법의 당위성을 실제적으로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 현행 국가의 법들로서는 판단중지의 한계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코란의 입각한 그들의 체제에서 발생되는 법이 있음에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종교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서 본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나의 글을 참고하기길 바란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 참고)

이처럼 성립되지 않는 종교의 법적체계의 주장을 폭력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국가나 여론이 비난하는 것이 진정 사태에 있어서 공정성을 오히려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더욱 언급하신 분의 몰지각한 법이해의 의도성은 비난받음의 당위성도 동시에 세워진다고 하겠다.



각주 2) 다음측의 'Tokyo-Athran'님과'금빛여우'님의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에 따른 의도성이 있는 여론몰이적 입장과 종교적 특수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임의적 실정법해석에 따라 무고한 자들을 범법자로 취급함에 있어서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다음측은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합리적이지 못한 것을 다음측에서 투표에 붙힌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임의적으로 그러한 분별없는 여론적 입장을 취한 것인지에 대하여서 다음측은 밝히기 바라며 그것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고려할 수 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생각없는 어떤 정치인도 이번 피랍사태를 종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부추기고 있는데, 개념없는 선동은 그만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요일, 6월 13, 2007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주장이나 그에 따른 글을 씀에 있어서 두 가지 '수행적'모순이 있다고 하겠다. 그 하나는 임의적 실제의식에서 '어원고찰'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또한 임의적 실제의식에서 비롯되어지는 '안티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직' 그리고 '이미'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개념의 정리라는 것이 모호한 가운데서 '객관적 근거지움'을 위한 노력들이 시대의 정신들의 특정적 기득권 의식을 가진 '다수'라는 '소수'의 개체에 의해서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있으나 그것이 기만으로서의 행보를 나타낸다면 그 폭력성과 기만은 그 시비를 거쳐서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론

한스큉의 명제에 대하여

가톨릭 신부로 남아있는 한스 큉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은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킨 것으로 보여지고 또한 심지어 기독교 즉 신교에서도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적 현상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은 재고되어야 함이 옳다고 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톨릭을 비판하여서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톨릭 본연(?)을 의도한다고 하지만 한스 큉은 그것을 말할 수 있었으나 진정 교회의 존재와 모습을 말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한스큉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서 아주 잘 비판하고 잘 기술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 교회의 모습으로서의 그것을 잘 기술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명제로서의 '예수는 가톨릭 신자였을까?'(각주1) 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스 큉 그는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 '원칙적'이란 말이 역은이의 기술적 표현인지 아니면 한스큉의 본래적 자기 표현인지에 대한 논의를 생각할 여지도 있고, 그런 가운데서 그 원칙을 말하는 그의 보편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 말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서 다음 언급이 진행되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명제로서의 언급에 있을 수 있는 또는 개인적인 예상적 입장의 표현으로써 가톨릭 체제의 모순적 입장을 언급하면서도 개연적 개념으로서의 비판적 모순이 유명무실함에 대한 것으로 다루어 명제의 원칙적 당위성을 손상없이 두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톨릭을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부로 남아 있는 가장 큰 그의 중심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 나는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원칙적 동의를 하는 가운데서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서론적으로 언급한 것 중에 하나와 같이 안티적 태제라는 개념은 객관적 근거지움에 있어서 치우칠 수 있다는 위험성과 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안티'라는 개념도 '본래성으로 구별되어질 수 있다'(각주2)면 그러한 수행적 모순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겠다는 중심에서 이런 태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가톨릭'과 '예수교' 라는 개념적 표현은 아주 반목의 세월과 그 가운데서 객관적 규정적 입장에서 그 차이의 사실을 많이 말해왔다고 할 수 있다.(각주3) 이러한 예수님께서 '가톨릭 신자'인가 아니면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논의는 그 표현적 어눌함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성립되어지지 않지만(각주4) 그것에 객관적 의미부여라고 하는 것의 실제의식의 판단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곳이 가톨릭이냐 아니면 예수교 즉 기독교로서의 신교인가 하는 것의 판단이라는 실제적 존재 타당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측이 모두 그리스도교로서의 형태적 동등성이 있고 현상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가톨릭이 앞서 존재함에 있어서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득권이 가톨릭에 있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에서야곱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롬 9:13)는 실제의식은 주의 말씀에 따른 것으로 가톨릭이나 신교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일단 전제적 인정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식을 하나님께 두는가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의 유무를 기준으로 보게 되어지며 시간적 순서라는 개념 즉 그 누가 말한 '취득시효'라는 개념으로 존재적 기득권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가톨릭의 우선성을 놓고 대표격으로 생각한다고 하여도 존재의 정당성 시비는 그것에서 비롯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인정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인식에 따른 존재의 당위성

앞서 한스 큉의 명제라고 하는 것과 그에 반해 나의 명제의 표현은 기술적 모순이 있는 것임을 먼저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부여에서의 인식은 그 시비를 분명히해야 하며 이것은 가톨릭과 예수교 즉 신교의 존재의 정당성 비교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되어진 한스 큉의 '원칙적'이라는 표현이 그의 본래적 언어이든지 아니면 역주의 변역상의 언어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스 큉 그의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러한 보편적 당위성에서 원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은 가톨릭과 신교의 존재적 정당성 시비를 가리는 입장에서의 이 글을 쓰는 나의 중심이기도 하다.

가톨릭과 신교의 신의 명칭에 대하여서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각주5)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가톨릭의 입장은 범신론이나 범재신론적 입장일 뿐이다(각주6). 이것은 참된 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 하나님을 객관적 존재 근거지움이라는 개념 특히 신 존재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신을 규정하는 것을 증거의 사실로써 비로소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삼위일체적개념도 그 바탕적 실제의 의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실재의식'의 기본적 개념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존재의 여부(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자존의 전능하신 하나님 이심을 계시한 것이다.

삼위일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삼위라는 개념이 상대적 언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구별하여서 속성적 표현언어로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구별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그 속성적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이 인식의 계기의 작업에 비로소 종속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속성전달과 같은 잘못된 합리적 모습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성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존재증명할 수 있다는, 증거보다는, 증명이라는 개념에 길들여진 탓으로 하나님을 이성에 비로소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교적 입장에서는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순적 삼위의 합리적 기술의 부재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도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통하여서 말씀하실 수 있고 합당하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삼신적 개념을 배제한 삼위로서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음을, 합리적 기술의 길들임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합당한 합리적 증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또는 임의적 수사로서의 '하나'에 '님'이라는 조사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합리적 사실을 증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존재를 증거하는 중심에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를 말하면서도 일체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 측면에서 합리적 모순이면서도, 실제적 의미에서는 합당한 합리적인 한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기술의 모순이라고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시며 오히려 그 모순을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기뻐하심의 구별하심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히시는 오직 한 분이심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비교의 관건은 신인식에 따른 해석에 있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에 있어서 가톨릭은 '예수는 범신론적 또는 범재신론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입장이고 신교는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각주7)

예수님의 죽으셨다 살아나심이라고 함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계시이심을 기억할 때에, 단지 하늘에 있는 신과의 위적 상관관계를 말할 수 있다는 가능태의 실재론에 입각해서는 예수의 실존과 그의 가르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스 큉의 명제는 기술상 뿐만 아니라 원칙상 실제상으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God)의 명칭에 있어서도 단지 하늘에 있는 이라는 여자적(如字的) 개념으로서의 '하늘'에서 비롯되어진 '하느님'이라는 상대적 보편언어보다는 한 분이시라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신앙적으로 옳은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본래성의 기득권 인식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하느님이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셨다'(각주8)라고 하는 글을 쓴 것을 보았는데, '스스로'라는 수식어는 자존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로소 사용함의 부당함을 말할 수 있다.

'스스로'라는 개념은 본래성을 의식하고 표현하는 말인데,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가 아니면 스스로 한다는 그 '스스로'라는 개념의 본래성을 배제한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동의되어질 수도 있어도, 하나님의 증거적 차원에서는 기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본래성의 기득권 인식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나는 '예수교'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특히 신교적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물론 자존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나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대의 추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참된 하나님을 향하는 그 중심은 이러한 중심을 향해 열려있다.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모든 기독교는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중심이 열려 있다는 것과 앞으로 그와 같은 신앙의 중심이 형성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각주9)

한스 큉의 명제 '예수는 가톨릭 신자인가?'라는 것은 기술상 그가 말하는 원칙상 그리고 실제적으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그가 의도하고 인식하고 원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실제적으로 예수에 대한 인식과 고백도 상식수준일뿐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에 대하여서 기술적 모순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나의 표현은 예수님이 신교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적인 증거의 표현임을 말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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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한스 큉, 가톨릭 교회, 배국원, 을유문화사 p. 31. pp. 31-33.


각주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은 어떤 것을 구별하여 하나의 개념화시키고 객관화시켜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측면에서의 성도의 모습의 일반적인 은총에 따른 개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실제의식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치우침이라는 개념의 언어도 온전히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사용함에 대한 정당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르게 구별되어지는가에 대한 주관적이면서도 합당한 판단을 믿음 안에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3) 물론 예수교라는 말이 우리나라의 표기적 입장을 따르고 있고 종교개혁의 역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어울릴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리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따른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예수교'라는 말을 쓰고 있다. 더욱 한스 큉의 가톨릭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의식할 때에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의 계시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한 언어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각주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입장에서 기술가능한 표현을 비로소 받지 않으신다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믿어 성도라는 이름을 얻는 자로서의 신자라는 개념으로 온전히 묘사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개념들의 비교라고 하는 것도 비교한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고 비교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너무 멀리 떨어진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과 예수의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메시아적 의식의 존재적 동연성을 시간적으로 잘못되게 이해하려는 현대주의적 신학개념에서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메시아라고 하는 개념을 시간의 판단하에 두는 즉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닌 가운데서 메시야로 생각하고 확신했다는 잘못된 개념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어왔다.(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역 엠마오 p. 13-115. 참고 : 게할더스 보스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에 대하여서 잘 소개 뿐만 아니라 잘 분별하여 답변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의 의식이라는 개념은 예수의 자기의식과 그것은 자신의 신앙과 자기 신뢰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존자로서의 합당한 신의식을 가지심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신자라는 말은 언급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진 언어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쓰여질 수 있는 말은 아닌 전문어에서 파생되어진 것으로써 일상적 상식보편으로는 사용되어질 수 없는 기술적 모순이 있고 쓰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각주5) 기독교와 세계, 이경숙 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 203.
가톨릭에서는 하늘에 있는 신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라는 뜻 표기를 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한분이라는 뜻에서 '하나'라는 수사에 '님'이라는 수사를 붙여서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신을 가르킨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 : 보통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본서 저자는 하나님으로 표기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전제하는 하늘의 신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


각주6)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은 신교에서도 고백하는 주기도문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절대자가 하늘이라는 한정적 범주에 있어서 한정되어지는 모습과 존재라는 개념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론적 개념을 글자 그대로만 생각하고 있고, 그로 인한 오류적 인식이다. 여자(如字)적 개념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있어야 한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도 자존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장소로서의 비유적 실제적 표현적 기술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늘이라는 객체에서 바로 하나님의 존재묘사적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 신교에서는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런 범재신론적 개념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각주7) 범신론은 사물자체에 정령과 같은 신이 있다 또는 신성시되어서 인식되어진 모든 신들을 의미하고 범재신론은 만물들 속에 신이 충만이 있다는 그러한 개념으로 구별되어질 수도 있다. 위르겐 몰트만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문자적 해석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서 있을 수 있는 잘못된 문자주의적 개념의 한 피해라고도 할 수 있다.

헬라어로 '엔 크리스토스εν Χριστος'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도 되지만, 문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 I believe in God 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해석이지만, 문자주의적 개념에서는 잘못되게 '나는 하나님 안에서 믿는다'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특히 너희 중에 라는 말은 Among이라는 말이 그와 같이 사이에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과 같은 측면도 지적할 수 있다. 즉 문자적 영감(inspiration) 즉 축자적 영감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 영감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가 있고 더 나아가서 그 '완전 영감(infallible inspiration)'이라는 것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의 그 실존이 있게 된다.

즉 총체적인 신인식이 불가지론의 영역에서 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의 악함에 따라서 문자적 극단주의자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각주8) 월프레드 G. 헐리, 내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 정진석 가톨릭출판사.

저자는 본문 중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셨다'는 표현과 그러한 중심의 글을 싣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존재적 자존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스스로 했다는 개념은 그 존재적 정당함을 상식선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하거나 또는 찾을 수 없는 그냥 막연한 당위성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도 붓다를 '스스로 깨어난 자'라는 입장의 글을 본 기억이 있는데 행위적 묘사의 수단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지는 '스스로'의 개념은 실존적 자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정당한 묘사와 증거의 능력은 없게 되며 그것을 의도한다면 기만이라는 판단을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

모두 개념의 실존을 임의적으로 말하거나 또는 상식차원에서 인용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의 판단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특히 신의 증거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러한 표현의 간교함과 기만은 죄악과 심판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각주9)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84-85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

“둘째 예언은 셈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명칭의 사용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서 벌써 셈에게 축복의 부여가 되는 것이다. 구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능력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이 특정한 족속의 종교적인 소유와 기쁨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깔려있다. 이는 셈족이 여호와를 경배하리라는 것 이상의 언약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어느 특정한 그룹의 하나님으로 불리운 최초의 것이다. 이는 그 족장이(이는 노아를 말함 역자주) 다음과 같은 송영을 말하게 될 정도의 경이적인 일이다. -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그분이 셈의 하나님이 (기꺼이) 되셨도다”이다.

중략

그리고 야벳이 셈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것을 셈과 야벳의 영적인 동거를 말하는 듯이 풍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제적인 정치적 정복이 의도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리적 정복이 야벳에게 종교적인 축복을 결과로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셈의 장막을 취함으로 거기서 구속과 계시의 하나님 되시는 셈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 일차적인 정치적인 정복에 있어서도, 그 결과적인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이 셈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정복은 참 종교가 세상에 편만케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델리취는 인상깊게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족속이다”라고 하였다.”

게할더스 보스 셈의 하나님 참고하세요

수요일, 3월 21, 2007

No '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

글을 씀에 있어서

학문의 깊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분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종교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들의 패닉현상에서 읽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적인 용어로서 '패닉발작'(panic attacks)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인식의 사실을 말함에 분별없는 강조의 개념으로써의 사실을 기정화하려는 어떤 종교학자의 모습의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에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지만, 바른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의 현대인의 한 치료방법으로써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당대의 필요충분적 조건이 성립되어지고 있고 기독교인의 합당한 사역적 증거로서도 당위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 본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티적 패닉 현상'('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라고 함의 규정적 입장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의 분별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는데, 그 분별이 없다고 함은 인식의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강요하는 기만적 모습의 병리현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분별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철학과 신학의 기본 인식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운데서 철학적 신학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거품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본론적 본문

이성의 분별로서, 구분구별이라고 할 때에 그 앞선 인식으로써 시간개념이 대두되어지고 그것은 역사관으로 이어지는데, 역사적 비평을 하면서 시간의 개념으로 대두되어지는 구분과 구별의 개념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역사적 연속성과 단절성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한 글들에 대하여서 답변함이 식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각주1)

1, 구성적 신학

'구성적 신학'(reconstructive thoelogy)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의 신학계에서 하나의 정설처럼 받아들이는 잘못된 경우(각주2)가 있기에 어떻게 해석해서 사실화 시킬 것이냐는 개념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사실화라는 것의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분별없다는 비판적 판단의 사실을 기정사실화임을 말하도록 함의 당위성의 본래성을 주장하게 한다.

조직신학교수인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박사의 상상의 보편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 형식에서 그의 합리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지만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초월의 개념 형성도 규정의 임의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상대적인 보편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절대의 개념을 판단하는 또는 임의적으로 옹호가능하다고 하면서 계시를 믿지도 않는 가운데서의 합리성 전개라고 하는 것은 규정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적인 측면의 개별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개별성이 갖게 되어지는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의 재가가 있는 것임을 수행적 모순에서라도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계시신학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자존적 정당함을 인정해주어야하는 상식보편의 합리적 당위성도 같이 세워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임의적 구성적 신학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야 하는 것으로써의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동의적 정당함까지도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구성신학의 개념의 보편이라는 측면과 범주에서는 여러가지 합리적 작업과 그에 따른 파생적 규정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임의적인 소리로서 개념없는 기독교에 대한 패닉발작 '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임의적 언어놀이들이 있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자들의 개념없음이 기본이 되어지는데 분석이라는 형식적 이성적 도구를 가지고 분별없이 행하고 있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쌍한 '판의 슬픔'(각주3)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다.


2. 구분과 구별

분별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적 구성근거를 지을 수 있는데, 구분이라는 것은 실재의 불연속이라는 개념에서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구별이라는것은 실재의 연속이라는 개념에서도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해에 앞선 사태이해에 있어서도 특히 역사라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역시 이 두가지 개념적 구성근거를 의식함이 요구되어지는데, 상황 논리에 따른다는 정황적 상대적 정당함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철학적 입장과 신학적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그 개념을 달리하는 것은 인정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또한 범주를 달리한다고 할 때에 유사비교에 따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그러한 모순적이라는 상대적 입장의 판단을 넘어서 사실규정을 할 수 있는 실제론의 규범적 실재라는 것을 재고할 때에는 사실을 위한 새롭게 사태인식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다.(각주4)

역사 비평과 그것에 따른 비평적 사실규정에 앞서, 역사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도 철학적인 입장에서는 그 역사 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해석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구분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종교학자들은 문헌적 전승의 성격을 취한 성경의 신구약의 구분과 선택적 취사로써 특히 역사적 후대의 개념이 실제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구약패기론이 대두되어질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느냐는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종교학자들의 생각하기 싫은 중심이 되어지는 것이다.

특히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납득 당위성을 부여하여서 합리성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하자는 측면을 마음에 두고 임의적으로 전제하고 그러한 것의 강변을 말하고 있는 모자람의 현학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가지론과 분석철학의 중요성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두와 함께 언급되어질 수 있는 철학적 경향이지만 상식이 절대를 비로소 말한다는 개념의 부적절함은 비트겐슈타인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각주5)

이처럼 사실이해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실재론에 입각한 합리성의 합당한 사실이해의 굴절적 이해가 실상 정당한 사실로서의 규정적 정당성시비에 따라 판단분별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속성의 두 가지 양태로서의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규정의 정당함은 그 실재론이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정당하게 말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한 철학과 신학의 실재론의 차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간과하려는 기만적 입장에서는 그 연속성의 양태 규정과 그러한 합리성으로 성경의 판단과 이해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분별없는 이성의 죄악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진다.

즉 신약과 구약의 불연속성을 말하는 역사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관은 실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중심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임의적 강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설인 것과 같이 이성적인 것과 같이 강요한다면 그것은 기만적 의도의 사실화로 거짓말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비단 신구약 성경의 형태적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만이 아니라 문서설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개념없는 계시적 근거없는 병열적 나열과 분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인데 그러한 불연속성 중에서 본문의 연대를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 없거나, 정당한 시간의 계시적 인식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임의적 문학적 접근이라는 특수성과 그 안에 담겨진 재가되어진 자존적 절대 보편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비이성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그러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같이 역사적 문헌을 언급하고 있지만 역사적 문헌인식에 앞에 그것을 해석하는 자로서의 인식이 이미 당위성을 잃었기에 니체주의자가 말하는 '잘됨'이라는 사실도 또한 '헤체적 사실'로서의 그것도 말하지 못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출 3:16절 해석을 함에 있어서, 이미 언급했지만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그러한 상대적 시간관에서 자신의 실존적 계시를 나타내시기를 스스로 합당하게 기뻐하실 때에 상대적인 역사관에서도 그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도 구별이라는 점에서 사실되어질 수 있는 두 양태들이다. 즉 구분되어짐으로써 말해야 할 것이 있고 구분되어지면서도 실존의 연속성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함의 성별(sanctify)은 하나님의 실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례에 따른 행위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의 실제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말씀하신 것이 항상 예만 되어짐에 있어서 그 말씀의 재가를 진정으로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태인식과 구분과 구별이 진정한 사실의 실존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인식계기로서의 시간과 그 시간의 표상으로서의 해와 달의 일상적인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표상의 기본적인 실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시간인식의 주관적 계기에 따른 시간관과 그에 따른 시간에서 역사적 실존의 연속성 특히 계시의로서의 성경의 실존적 구분과 부분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의 전개로서의 전승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해와 달이라는 시간인식계기로서(창 1:14)의 일상적인 시간 속에 주예수님의 역사성을 사실로 받게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체의 정당함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예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실존을 찾는 것이 그 근본적 기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일반 역사성의 실존도 해석되어진 가운데서 진정한 역사성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형식적인 실존으로서 일상적 역사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참되게 구별하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한방법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에 따른 사실규정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 실존의 규정적 사실도 재가하는 가운데서 구별하게 된다.

계시의 실존으로서의 성경은 일반 문헌으로서의 형식적 존재와 형성이라는 개념을 취득했지만 그러나 그 앞서 그 성경의 실존은 이미 태초라는 시간적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형식적인 실존의 선재라는 철학적 개연적 이해라는 것을 받지 않으면서도 존재했고 시간의 창조자로서 말씀은 시간 아래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잘됨'의 판단을 비로소 실제적으로 받지 않는 실존인 것이다.

즉 역사적 사태라는 사실인식의 정황적 판단하에 있으면서도 실재론적 범주의 다름을 인해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실존이기 때문에 그 사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때라는 시간적 모순의 표현 속에서도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시간 자체의 표현적 실존적 부족함이 말씀의 실존의 부족함으로 이입되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론에 즈음해서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어떤 실존을 비평함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분별력은 먼저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개념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실존개념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한 가운데서 역사비평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분별의 형식은 갖추려고 노력했으나 분별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분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 함의 당위성이 사실화되어진다.

한 가지 언급해두는 것은 구성적신학(reconstructive theology)이라고 하는 것의 형태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을 비로소 다루는 범주에서 이 글이 논의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형식적으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 판단의 실제를 받지 않는 실재론적 범주를 달리하고 그 하나님의 실재론적 규정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이기 때문에 소위 어떻게 말을 잘할까하는 것에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당한 신실함을 증거할 것인가에 대한 재가적 차원의 사실규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티적 패닉발작''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웃으심이며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핑계치 못함에 대한 당위성이 없는 병리적 이성의 활동에 대한 연민과, 판단과 심판이 있게 될 것을 지적해두면서 글을 맺도록 한다.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칸트에게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간인식의 계기로서 해와 달에 따른 시간인식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해와 달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다는 것(창 37:6~9)은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에서 진정한 해와 달의 질서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과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속의 시간과 그것의 해석자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존하게 된다는 것 성도의 시간인식에서 비롯되어진 사실규정의 합당함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인쳐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No '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 is allowed.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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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김용옥,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저자의 요한복음 강해도 있으나 기독교 성경에 대한 이해의 바르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이 규정된다면 요한복음에 대한 강해도 의미를 비로소 상실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앞서 '논술강의'도 실재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가운데서 비판되었는데 저자에 대한 필자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각주2) 데이비드 리밍,신화 -믿음직한 믿음의 전기- 참고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 by Gordon Kaufmann,)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p. 7-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교수 글 중)

고든 카우프만의 글 인용문

하바버드 대학 신학부 조직신학교수인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박사의 초기작품(1979년),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저술이 이에 근거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미국 및 전 세계적으로 그가 차지하는 신학적 비중, 창조적 역량이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 교수의 저작들이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금번 기독교통합연구소의 작업으로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저서《신학방법론》이 출간됨으로써 우리 모두는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들여다 볼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신학적이며 신앙적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 by Gordon Kaufmann,)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7.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교수 글 중)

한편 카우프만은 다원주의 신학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 신학 자체에 관심하는 학자는 아닌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함의 방법론을 말할 때 언제든지 슐라이어마허, 트뢸치의 선상에 서 있다.(중략) 이제 카우프만은 자신이 신학을 신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또는 재구성신학(reconstructive theology)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우프만이외에도 신학, 특별히 지금까지의 조직신학을 구성신학, 재구성신학으로 부르는 많은 신학자들 및 그들의 책(대표적인 것으로 Reconstructing christian theology (R. chopp eds.)와 Winds of the spirit :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P. Hodgson)]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용어를 가장 앞서 사용한 사람은 카우프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하느님 담론은 지금껏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 삶의 방향성을 지시해온 것으로서 삶의 근거와 준거들이 된다는 의미에서 절대성을 지닌다고 역설한다. 이는 하느님 개념이 결코 세계에 의존되거나 세계 개념 자체가 하느님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 속에서 종교의 본질, 곧 종교의 자리를 분명하게 변증하려는 의도를 읽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 그가 계시신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긴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 담론은 현대적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을 말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구성해왔던 것인데, 인간 중심적으로 체계화된 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의 방향과 의미의 준거틀로 그 역할을 다한다고 보는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카우프만의 Theology for a Nuclear Age(1985)와 In Face of Mystery(1933)저서들은 모두 현대적 현상적 경험 속에서 하느님을 사실적합하게 재구성하려는 신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필자의 견해 : 데이비드 리밍의 책은 영국,옥스포드에서 볼 수 있는 견해로 볼 수 있는 한 예인데, 그들은 허구이지만 긍정적 유익을말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것은 구성적 신학의 영향하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합리화라는 개념에서는 '사르트르의 상상적 입장에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자유의 보편과 힘 그리고 본래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을 근거'(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p.96-97, p. 101.**)로 신학에 대한 비판과 옹호라는 개념이 같은 범주에서 있게 되어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카우프만은 이러한 점에서 옹호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은 계시라는 개념의 자존적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 외에 그 본래성을 말함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 표현의 화려함 속에 있게 되는 기만에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옹호의 사실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강변만이 있게 되고 또다른 반론적 강변이 있게 되어지는 합리적인 공허적 상상의 충돌만 있게 되는 패닉현상만 불러올 수 있게되며 식상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악한 종들의 모습에 서야 하는 고통이 기정사실화 되어진다고 하겠다.



** 내용 인용

사르트르는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초월의 힘을 상상의 자발성(spontaneite이 자발성은 자의성(volonte)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이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활동 이전의 근원적인 의식의 존재양상이고 후자는 자아의 의지적 활동이다.-역자주)이라고 부른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상상의 지향적인 자유와 자발성에는 사르트르가 '본질적인 빈곤'이라고 부른 것이 수반된다. 결국 정육면체 또는 철수의 심상은 우리에게 실재를 재공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사관찰일 뿐이다. 자유로운 상상의 자발성은 지각되는 실재로서 대상의 현전을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나온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상상을, 사물을 (실지로 경험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비물성(no-thingness)으로서 현전할 수 있게하는 의식의 비현실화하는 힘으로 정의한다.
(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p.96-97.)

즉 정신병리학적 무의식의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결코(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우리 외부의 어떤 '원인'에 우리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록 자유롭지 않다고 자신을 속이는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항상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자유로운 미학적 상상의 작용과 물화된 자기집착 의식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사르트르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정초한다.
(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 101.)


필자의 비평 : 사르트르의 자발성(spontaneite)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의지되어진다고 하는 자의성(volonte)과 구별하는 것으로써의 규정함에 있어서는 아주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현상적 인식적 사태이해를 한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적 사태이해라고 하는 것의 사실로서의 납득 당위성은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과 상대적 정당성에 따른 합리성의 규정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결점은 그 합리적 파생성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정당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지 합리성이 자체적 정당성을 비로소 주장할 수 있다는 개념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비물화하는 힘의 의지적 표현이라고 하여도 그 힘으로서의 정당성 부여도 역시 절대와 상관성이 없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 할 수 없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존재적 정당함에 있어서 스스로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상대적 현상적 실존이해와 사실납득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해석자로서의 이입적 판단에 정당함을 필요로 하며 요청할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 할 수 없다는 판단의 규정에 자존적 정당함에 따라서 기각시킴의 정당함도 스스로 취하여서 재가된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정당함도 부여한다. 여기서 성경의 자존적 증거 자증(Autopistia)의 문헌적 실존과 실제의 역사적 사실성이 합당하게 규정된다.

한마디로 사르트르의 상상의 작용과 물화된 집착의식 사이를 구별하여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그 존재론적 구별의 기준으로써의 자발성(spontaneite)은 계시의 실존으로서의 출애굽기 3장 14절의 자존'하야'동사의 기호적 계시의 실존으로서 담긴 기의적 해석적 실존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각주3) 멜라니아 파라시,조르조 바킨 외 그림,고전신화,그리스와 로마의 신과 영웅들,노성두,사계절 p.49.

'아테나는 피리를 발명해서 불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아테나더러 두 뺨에 바람을 잔뜩 넣고 피리를 불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서 보기 싫다며 참견을 했다. 정나미가 떨어진 아테나가 피리를 버리자 마르시아스가 그것을 냉큼 주워든다. 그리고 오랜 연습 끝에 아폴론과 연주 솜씨를 겨루게 된다. 음악 경연 대회의 심판은 아테나가 보았다 결과는 아폴론의 승리!'

'나무에 달린 마르시아스 :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에게 도전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나무에 매달려서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들은 이 일을 두고 육체의 껍질을 벗고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정화의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필자의 견해 : 이탈리아 사람 멜라니아 파라시의 작품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마르시아스는 판의 다른 이름으로 동일한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는 불가지론의 사실을 알 수 없는 가운데서 합리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계보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과 관련되어질 수 있는 실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할 수도 있다는 재구성신학과 같은 실재론의 부재의 글들과 인식이 지금에 대두 되어지는 합리성의 출정이라면, 아마도 그들의 신화적 한 모습으로 마르시아스의 운명이라는 판단을 잘됨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각주4) 필자의 견해 : 단도직입적으로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태인식에 따른 현상적 사실규정이라는 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고 또한 사실규정의 정당함을 임의적인 개념에서 밖에 말할 수 없고 그것의 강요라는 사실 확인은 기만이라는 사실을 성립하게 할 뿐이다.

신학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은 중세에 오해되어지고 잘못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이 있게 되었는데, 실상은 그들은 하나님의 실재라고 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따라 존재증명이라는 개념을 따르고 있는 잘못을 범하고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론적 실재규정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규정으로써 플라톤이 찾지 못한 것으로 진정한 사실규정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각주5) 에드문트 야코비, 클라시시커 50 철학가,안성찬역, 해냄 p. 36.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저 유명한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이 말의 의미는 철학은 우리를 엄밀한 과학으로 이끌어야 하며 그것으로 소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우리에게 그 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철학은 엄밀한 수학에서 시작해야하지만 궁극적으로 개념을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시인의 언어로 암시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다시 말해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유의 피안에 존재하는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 : 한 때, 철학의 종언을 말하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입장 해석을 야코비와 같이 플라톤의 개념의 실존을 찾는 가운데서의 새로움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의 철학의 종언에 대한 해석적 사실을 재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서양철학의 전반적인 사상의 실험이 끝나고 가능성의 실제적인 개념의 보편에 따른 재구성적 실험의 가능성을 의지할 뿐인데, 이미 그 개념적 실존을 찾는 것에 대한실패의 선래는 그 가능성에 대한 불가능을 선포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영원회귀적 개념에서 본다면 '개념을 찾지 못한 실패한 가능성의 영원회귀'라는 것의 반복실험밖에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러한 개념에서 해탈적 개념, 개념의 실존의 탈존이라는 것에서 말한다 하여도 그러한 탈실존이라는 것도 역시 가능성이라는 실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범주의 영향아래 여전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그 설득력의 사실을 지적할 수 더욱 있다는 것이다. 해탈의 종교도 역시 해탈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기만속에서 자기를 달래는 임의적 행동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의 실재로서 인간의식이라고 함을 말함'(가능성,장영란,이대 철학과 강의,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단편논문)산해출판참고),과 그러한 실존으로써의 사상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구교의 입장이 되어질 수 있는데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시간의 실재론을 말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인식임을 기억할 때'(소광희,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p. 226.*)에 여전히 분별없는 가운데서 신학적 실재론을 잘못되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식의 정직함이 결여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 안에서 그것들 중에 그들의 실재관과는 다르게 해석해서 실제 사실로서 받을 수 있는 기준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적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실제규명으로서의 신학이다.

*표의 내용 인용

'있기도 하고 있지않기고 한 것으로 합성된 것(즉 시간)은 온전한 실재성(實在性)을 가질 수 없다. 이점에서 시간은 운동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 전체로서 있거나 부분으로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은 (존재와 비존재로 합성된 것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으로 분활될 수 있다.'(소광희,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p. 226.*)

화요일, 2월 13, 2007

종교개혁의 사실 이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현상적이라는 접근을 기본적으로 전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즉 교황권(각주1)이라는 것이나 면죄부판매라는 것과 같은 것이 한 예들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라는 기호에 나타나는 기의적 측면을 임의적으로 간과한다는 것은 지금의 종교개혁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정당화하게 한다.


그 요소들 중에서도 중세 구교의 교황의 면죄부 사건의 한 극단적인 측면의 한 야화(각주2)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것은 그 면죄부로 인해서 비로소 종교개혁의 말하게 되었다는 단정적 의미는 재고되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 면죄부를 발매하게 된 그 인식적 입장과 그 신인식에 대한 존재적 근거지움(각주3)이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재고가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함을 말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에 구교의 신인식과 존재의 근거에 대한 답변하는 주장의 당위성은 기각되어진다고 봄이 합당하다고 하겠다.그것이 바로 반종교개혁이라는 내적 성찰이라고 하는 것도 여전히 실제적인 개혁을 하지 못한 잘못된 중세의 연속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보며 그것은 신인식의 올바르지 못함이 그 실제적 판단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바르게 믿지 않음이 그것이라고 하겠다.









각주 1) 성경을 인용한 교황권에 대한 입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적인 측면의 합리성일뿐 진정으로 잘인용했다는 것의 실제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개연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냥 그렇게도 인용할 수 있다는 정도를 못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에서는 어떤 사실(성경인용에 대한 사실을 포함해서) 그것을 재가할 신론적 실재는 합리성에서 비로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스스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퀴나스의 신론적 입장과 그리고 그것의 기반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기반에서는 식상한 인용만이 난무하며 화려함을 뽐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상대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한에 있어서는 진정 인용의 사실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서의 교황적 실재의 성경 당위성 인용은 이미 부정되어진 범주에서 규정되어지는 가능태적인 실제로서의 기만이 될 뿐이다.


각주 2)
양인식 역 나만 모르는 유럽사, 모멘토 p. 126.

이런 상황 아래서 등장한 메디치가의 교황 레오 10세도 교회의 ‘부패’에는 대처하지 않은 채 메디치가의 권위 확대를 위해 교황의 지위를 이용했다. 레오는 “신에게 받은 교황의 지위를 크게 즐기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양인식 역 나만 모르는 유럽사, 모멘토 p. 127.

낭비가 심했던 레오 시대에 교황청 재정은 파탄이 났다. 레오는 부호에게 융자를 받았고 대량의 관직과 성직을 팔았으며 면죄부를 남발했다. 왕권이 강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면죄부의 판매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국가 통일이 늦은 독일에 집중되었다. 이것이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비판을 받아 종교개혁의 시금석이 되었다.



필자의 부언 : 물론 이러한 야화에 대한 글을 싣고 있는 저자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안티 가톨릭적 입장에서 무리하게 이러한 입장의 왜곡을 시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그 면죄부 판매보다도 그런 말을 했다고 할 때에 그 인식적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으로 비판적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론적 입장에서 바르게 근거지움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다면 그 직위적 개념의 모습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단정해서 입장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물론 개신교 측에서도 교권적 입장이 현재 무리하게 나타난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목회자의 세습적 개념을 말하려고 했던 교단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 본인의 교회와 교단소속은 아니지만 그리고 현대신학적 입장으로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서 전 교계에서는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믿지 않는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파생적인 개념이 아니라 본래성으로써의 정당함에 의해 파생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인식은 바로 여기서 실제의식을 찾는 것이 그 자체적 본래성적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각주3) 장욱, 토마스아퀴나스의 철학, 존재와 진리, 동과서 pp. 19-20.
그는 존재론자로서의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실재론적 접근에 실패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존재의 알려짐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과 비교하여서 존재론이 관념론에서 실재론으로 이어짐에 대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실재론도 존재가 존재한다는 그러한 개념에서 시작함에 대한 근거에 대한 물음에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 : 장교수 자신의 입장을 온건한 토미스트들을 따랐음에 대한 것을 밝히고 있는데, 시간이 흐른후 그러한 토미스트들의 입장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여지지만, 에띠엔느 질송도 따르고 있음을 언급한 바가 있다.(상게서 p. 8.참고) 그런데 그 에티엔느 질송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해석에서 그냥 성경인용의 가능성에서의 모습을 하나의 기표로 삼고 그것에 기의적 의미를 임의적으로 설정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즉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실제의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라는 개념을 희랍철학의 존재한다는 개념의 유비적 개념으로 성경에 미리 기록되어진 것으로써의 취득시효적 개념의 유효성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적 개념의 판단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시간의 판단에 비롯되어진 정의적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는 것과 같이 잘못 이해하는 길을 열어놓고 말은 것이다.

물론 장교수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신학의 분리가능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그의 신학적 비판으로 연결될 수 없는 불연속성을 마음에 두고 언급한 것을 상게서에서 읽을 수 있는데, 그래도 기억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시간론의 실재론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 그러한 시간의 실재론적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 취득시효적 입장의 성경의 기록이 앞선다는 개념에서 당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관계된 철학적 입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도 타당성을 입을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정적인 입장에서 실재론을 추론한다고 하여도 합리적 당위성에서 비로소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즉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화가 절대적 정당화로써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해야 하는 것이다.

합리성 자체가 절대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주장할수 있는가 그 본래성이 파생적 개념에서 비로소 자체적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성에 따른 철학적신학은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야 함의 당위성이 본래성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말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특성이 일상적인 것의 현상적 인식에서 출발함의 특성을 말할 때에, 그런 상대적 현상이해에서의 스스로의 원리 발견이라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비로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해가 앞서 말한 언급의 판단에 대한 본래성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요청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즉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비로소 규정할 수 없다. 규정하고 싶은 유심적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존재의 근거지움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시비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실재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사변철학에서 파생된 실재와 실제론에 입각한 존재에 대한 답변을 함에 있어서 그것은 존재의 근거지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함이 본래성을 가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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