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3월 21, 2007

No '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

글을 씀에 있어서

학문의 깊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분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종교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들의 패닉현상에서 읽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적인 용어로서 '패닉발작'(panic attacks)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인식의 사실을 말함에 분별없는 강조의 개념으로써의 사실을 기정화하려는 어떤 종교학자의 모습의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에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지만, 바른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함에 있어서의 현대인의 한 치료방법으로써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당대의 필요충분적 조건이 성립되어지고 있고 기독교인의 합당한 사역적 증거로서도 당위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 본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티적 패닉 현상'('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라고 함의 규정적 입장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의 분별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는데, 그 분별이 없다고 함은 인식의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강요하는 기만적 모습의 병리현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분별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철학과 신학의 기본 인식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가운데서 철학적 신학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거품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본론적 본문

이성의 분별로서, 구분구별이라고 할 때에 그 앞선 인식으로써 시간개념이 대두되어지고 그것은 역사관으로 이어지는데, 역사적 비평을 하면서 시간의 개념으로 대두되어지는 구분과 구별의 개념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역사적 연속성과 단절성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한 글들에 대하여서 답변함이 식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각주1)

1, 구성적 신학

'구성적 신학'(reconstructive thoelogy)이라고 하는 것을 현대의 신학계에서 하나의 정설처럼 받아들이는 잘못된 경우(각주2)가 있기에 어떻게 해석해서 사실화 시킬 것이냐는 개념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사실화라는 것의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분별없다는 비판적 판단의 사실을 기정사실화임을 말하도록 함의 당위성의 본래성을 주장하게 한다.

조직신학교수인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박사의 상상의 보편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 형식에서 그의 합리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지만 상식보편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초월하는(초월의 개념 형성도 규정의 임의성을 벗어날 수 없지만)상대적인 보편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절대의 개념을 판단하는 또는 임의적으로 옹호가능하다고 하면서 계시를 믿지도 않는 가운데서의 합리성 전개라고 하는 것은 규정적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형식적인 측면의 개별성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개별성이 갖게 되어지는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의 재가가 있는 것임을 수행적 모순에서라도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계시신학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자존적 정당함을 인정해주어야하는 상식보편의 합리적 당위성도 같이 세워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임의적 구성적 신학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야 하는 것으로써의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동의적 정당함까지도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구성신학의 개념의 보편이라는 측면과 범주에서는 여러가지 합리적 작업과 그에 따른 파생적 규정의 사실을 임의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임의적인 소리로서 개념없는 기독교에 대한 패닉발작 'the panic attack to Christianity'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임의적 언어놀이들이 있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자들의 개념없음이 기본이 되어지는데 분석이라는 형식적 이성적 도구를 가지고 분별없이 행하고 있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쌍한 '판의 슬픔'(각주3)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다.


2. 구분과 구별

분별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적 구성근거를 지을 수 있는데, 구분이라는 것은 실재의 불연속이라는 개념에서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구별이라는것은 실재의 연속이라는 개념에서도 규정하는 양태적 사실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해에 앞선 사태이해에 있어서도 특히 역사라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역시 이 두가지 개념적 구성근거를 의식함이 요구되어지는데, 상황 논리에 따른다는 정황적 상대적 정당함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철학적 입장과 신학적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그 개념을 달리하는 것은 인정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또한 범주를 달리한다고 할 때에 유사비교에 따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그러한 모순적이라는 상대적 입장의 판단을 넘어서 사실규정을 할 수 있는 실제론의 규범적 실재라는 것을 재고할 때에는 사실을 위한 새롭게 사태인식의 정당함은 성립되어질 수 있다.(각주4)

역사 비평과 그것에 따른 비평적 사실규정에 앞서, 역사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도 철학적인 입장에서는 그 역사 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해석의 차이라는 개념에서 구분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종교학자들은 문헌적 전승의 성격을 취한 성경의 신구약의 구분과 선택적 취사로써 특히 역사적 후대의 개념이 실제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구약패기론이 대두되어질 수 있음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 인터벌(interval)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느냐는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규정할 수 있는 정당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종교학자들의 생각하기 싫은 중심이 되어지는 것이다.

특히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납득 당위성을 부여하여서 합리성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당연한 것으로 하자는 측면을 마음에 두고 임의적으로 전제하고 그러한 것의 강변을 말하고 있는 모자람의 현학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가지론과 분석철학의 중요성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두와 함께 언급되어질 수 있는 철학적 경향이지만 상식이 절대를 비로소 말한다는 개념의 부적절함은 비트겐슈타인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각주5)

이처럼 사실이해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실재론에 입각한 합리성의 합당한 사실이해의 굴절적 이해가 실상 정당한 사실로서의 규정적 정당성시비에 따라 판단분별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속성의 두 가지 양태로서의 연속과 불연속이라는 규정의 정당함은 그 실재론이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정당하게 말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한 철학과 신학의 실재론의 차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간과하려는 기만적 입장에서는 그 연속성의 양태 규정과 그러한 합리성으로 성경의 판단과 이해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분별없는 이성의 죄악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진다.

즉 신약과 구약의 불연속성을 말하는 역사인식의 계시로서의 시간관은 실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중심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임의적 강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설인 것과 같이 이성적인 것과 같이 강요한다면 그것은 기만적 의도의 사실화로 거짓말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비단 신구약 성경의 형태적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만이 아니라 문서설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개념없는 계시적 근거없는 병열적 나열과 분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인데 그러한 불연속성 중에서 본문의 연대를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 없거나, 정당한 시간의 계시적 인식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임의적 문학적 접근이라는 특수성과 그 안에 담겨진 재가되어진 자존적 절대 보편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비이성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그러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같이 역사적 문헌을 언급하고 있지만 역사적 문헌인식에 앞에 그것을 해석하는 자로서의 인식이 이미 당위성을 잃었기에 니체주의자가 말하는 '잘됨'이라는 사실도 또한 '헤체적 사실'로서의 그것도 말하지 못하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출 3:16절 해석을 함에 있어서, 이미 언급했지만 즉,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고, 그런 가운데서는 신의 참됨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인 파생적 신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으로 그러한 상대적 시간관에서 자신의 실존적 계시를 나타내시기를 스스로 합당하게 기뻐하실 때에 상대적인 역사관에서도 그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구분과 구별이라는 개념도 구별이라는 점에서 사실되어질 수 있는 두 양태들이다. 즉 구분되어짐으로써 말해야 할 것이 있고 구분되어지면서도 실존의 연속성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함의 성별(sanctify)은 하나님의 실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례에 따른 행위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의 실제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가 말씀하신 것이 항상 예만 되어짐에 있어서 그 말씀의 재가를 진정으로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태인식과 구분과 구별이 진정한 사실의 실존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인식계기로서의 시간과 그 시간의 표상으로서의 해와 달의 일상적인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표상의 기본적인 실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시간인식의 주관적 계기에 따른 시간관과 그에 따른 시간에서 역사적 실존의 연속성 특히 계시의로서의 성경의 실존적 구분과 부분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의 전개로서의 전승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해와 달이라는 시간인식계기로서(창 1:14)의 일상적인 시간 속에 주예수님의 역사성을 사실로 받게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체의 정당함을 자존의 절대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예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그 실존을 찾는 것이 그 근본적 기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일반 역사성의 실존도 해석되어진 가운데서 진정한 역사성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그것은 형식적인 실존으로서 일상적 역사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참되게 구별하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한방법으로서 상대적 실존의 판단에 따른 사실규정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상대적 실존의 규정적 사실도 재가하는 가운데서 구별하게 된다.

계시의 실존으로서의 성경은 일반 문헌으로서의 형식적 존재와 형성이라는 개념을 취득했지만 그러나 그 앞서 그 성경의 실존은 이미 태초라는 시간적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형식적인 실존의 선재라는 철학적 개연적 이해라는 것을 받지 않으면서도 존재했고 시간의 창조자로서 말씀은 시간 아래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잘됨'의 판단을 비로소 실제적으로 받지 않는 실존인 것이다.

즉 역사적 사태라는 사실인식의 정황적 판단하에 있으면서도 실재론적 범주의 다름을 인해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실존이기 때문에 그 사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때라는 시간적 모순의 표현 속에서도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시간 자체의 표현적 실존적 부족함이 말씀의 실존의 부족함으로 이입되어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론에 즈음해서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 어떤 실존을 비평함에 있어서 갖추어야 할 분별력은 먼저 역사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개념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실존개념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한 가운데서 역사비평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분별의 형식은 갖추려고 노력했으나 분별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분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 함의 당위성이 사실화되어진다.

한 가지 언급해두는 것은 구성적신학(reconstructive theology)이라고 하는 것의 형태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을 비로소 다루는 범주에서 이 글이 논의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형식적으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형식적 판단의 실제를 받지 않는 실재론적 범주를 달리하고 그 하나님의 실재론적 규정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진 합리성이기 때문에 소위 어떻게 말을 잘할까하는 것에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당한 신실함을 증거할 것인가에 대한 재가적 차원의 사실규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안티적 패닉발작''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웃으심이며 자존의 절대자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핑계치 못함에 대한 당위성이 없는 병리적 이성의 활동에 대한 연민과, 판단과 심판이 있게 될 것을 지적해두면서 글을 맺도록 한다.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칸트에게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간인식의 계기로서 해와 달에 따른 시간인식을 말씀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해와 달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다는 것(창 37:6~9)은 하나님의 계시의 실존에서 진정한 해와 달의 질서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과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속의 시간과 그것의 해석자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존하게 된다는 것 성도의 시간인식에서 비롯되어진 사실규정의 합당함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인쳐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No 'the panic attacks to Christianity' is allowed.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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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김용옥,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저자의 요한복음 강해도 있으나 기독교 성경에 대한 이해의 바르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이 규정된다면 요한복음에 대한 강해도 의미를 비로소 상실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앞서 '논술강의'도 실재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가운데서 비판되었는데 저자에 대한 필자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각주2) 데이비드 리밍,신화 -믿음직한 믿음의 전기- 참고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 by Gordon Kaufmann,)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p. 7-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교수 글 중)

고든 카우프만의 글 인용문

하바버드 대학 신학부 조직신학교수인 카우프만(Gordon D. Kaufmann)박사의 초기작품(1979년),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저술이 이에 근거하고 있을 만큼 중요한《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미국 및 전 세계적으로 그가 차지하는 신학적 비중, 창조적 역량이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 교수의 저작들이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금번 기독교통합연구소의 작업으로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저서《신학방법론》이 출간됨으로써 우리 모두는 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들여다 볼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신학적이며 신앙적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An Essay on Theological Method. by Gordon Kaufmann,)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7.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교수 글 중)

한편 카우프만은 다원주의 신학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종교 신학 자체에 관심하는 학자는 아닌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함의 방법론을 말할 때 언제든지 슐라이어마허, 트뢸치의 선상에 서 있다.(중략) 이제 카우프만은 자신이 신학을 신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또는 재구성신학(reconstructive theology)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우프만이외에도 신학, 특별히 지금까지의 조직신학을 구성신학, 재구성신학으로 부르는 많은 신학자들 및 그들의 책(대표적인 것으로 Reconstructing christian theology (R. chopp eds.)와 Winds of the spirit :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P. Hodgson)]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용어를 가장 앞서 사용한 사람은 카우프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하느님 담론은 지금껏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 삶의 방향성을 지시해온 것으로서 삶의 근거와 준거들이 된다는 의미에서 절대성을 지닌다고 역설한다. 이는 하느님 개념이 결코 세계에 의존되거나 세계 개념 자체가 하느님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 속에서 종교의 본질, 곧 종교의 자리를 분명하게 변증하려는 의도를 읽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 그가 계시신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긴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 담론은 현대적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을 말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구성해왔던 것인데, 인간 중심적으로 체계화된 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의 방향과 의미의 준거틀로 그 역할을 다한다고 보는 것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카우프만의 Theology for a Nuclear Age(1985)와 In Face of Mystery(1933)저서들은 모두 현대적 현상적 경험 속에서 하느님을 사실적합하게 재구성하려는 신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9.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필자의 견해 : 데이비드 리밍의 책은 영국,옥스포드에서 볼 수 있는 견해로 볼 수 있는 한 예인데, 그들은 허구이지만 긍정적 유익을말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것은 구성적 신학의 영향하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합리화라는 개념에서는 '사르트르의 상상적 입장에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자유의 보편과 힘 그리고 본래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을 근거'(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p.96-97, p. 101.**)로 신학에 대한 비판과 옹호라는 개념이 같은 범주에서 있게 되어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카우프만은 이러한 점에서 옹호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은 계시라는 개념의 자존적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 외에 그 본래성을 말함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 표현의 화려함 속에 있게 되는 기만에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옹호의 사실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강변만이 있게 되고 또다른 반론적 강변이 있게 되어지는 합리적인 공허적 상상의 충돌만 있게 되는 패닉현상만 불러올 수 있게되며 식상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주는 악한 종들의 모습에 서야 하는 고통이 기정사실화 되어진다고 하겠다.



** 내용 인용

사르트르는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초월의 힘을 상상의 자발성(spontaneite이 자발성은 자의성(volonte)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이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활동 이전의 근원적인 의식의 존재양상이고 후자는 자아의 의지적 활동이다.-역자주)이라고 부른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상상의 지향적인 자유와 자발성에는 사르트르가 '본질적인 빈곤'이라고 부른 것이 수반된다. 결국 정육면체 또는 철수의 심상은 우리에게 실재를 재공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사관찰일 뿐이다. 자유로운 상상의 자발성은 지각되는 실재로서 대상의 현전을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나온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상상을, 사물을 (실지로 경험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비물성(no-thingness)으로서 현전할 수 있게하는 의식의 비현실화하는 힘으로 정의한다.
(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p.96-97.)

즉 정신병리학적 무의식의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결코(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우리 외부의 어떤 '원인'에 우리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록 자유롭지 않다고 자신을 속이는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항상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자유로운 미학적 상상의 작용과 물화된 자기집착 의식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사르트르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정초한다.
(리처드 커니,현대유럽철학의 흐름,임헌규,곽영아,임찬순 한울, p. 101.)


필자의 비평 : 사르트르의 자발성(spontaneite)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의지되어진다고 하는 자의성(volonte)과 구별하는 것으로써의 규정함에 있어서는 아주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현상적 인식적 사태이해를 한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적 사태이해라고 하는 것의 사실로서의 납득 당위성은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과 상대적 정당성에 따른 합리성의 규정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결점은 그 합리적 파생성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정당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나타나고 있지 합리성이 자체적 정당성을 비로소 주장할 수 있다는 개념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비물화하는 힘의 의지적 표현이라고 하여도 그 힘으로서의 정당성 부여도 역시 절대와 상관성이 없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 할 수 없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존재적 정당함에 있어서 스스로라는 개념을 말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상대적 현상적 실존이해와 사실납득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해석자로서의 이입적 판단에 정당함을 필요로 하며 요청할 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 할 수 없다는 판단의 규정에 자존적 정당함에 따라서 기각시킴의 정당함도 스스로 취하여서 재가된 합리성은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정당함도 부여한다. 여기서 성경의 자존적 증거 자증(Autopistia)의 문헌적 실존과 실제의 역사적 사실성이 합당하게 규정된다.

한마디로 사르트르의 상상의 작용과 물화된 집착의식 사이를 구별하여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그 존재론적 구별의 기준으로써의 자발성(spontaneite)은 계시의 실존으로서의 출애굽기 3장 14절의 자존'하야'동사의 기호적 계시의 실존으로서 담긴 기의적 해석적 실존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각주3) 멜라니아 파라시,조르조 바킨 외 그림,고전신화,그리스와 로마의 신과 영웅들,노성두,사계절 p.49.

'아테나는 피리를 발명해서 불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아테나더러 두 뺨에 바람을 잔뜩 넣고 피리를 불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서 보기 싫다며 참견을 했다. 정나미가 떨어진 아테나가 피리를 버리자 마르시아스가 그것을 냉큼 주워든다. 그리고 오랜 연습 끝에 아폴론과 연주 솜씨를 겨루게 된다. 음악 경연 대회의 심판은 아테나가 보았다 결과는 아폴론의 승리!'

'나무에 달린 마르시아스 :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에게 도전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나무에 매달려서 산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들은 이 일을 두고 육체의 껍질을 벗고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정화의 과정이라고 해석했다.'

필자의 견해 : 이탈리아 사람 멜라니아 파라시의 작품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마르시아스는 판의 다른 이름으로 동일한 존재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는 불가지론의 사실을 알 수 없는 가운데서 합리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계보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과 관련되어질 수 있는 실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할 수도 있다는 재구성신학과 같은 실재론의 부재의 글들과 인식이 지금에 대두 되어지는 합리성의 출정이라면, 아마도 그들의 신화적 한 모습으로 마르시아스의 운명이라는 판단을 잘됨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각주4) 필자의 견해 : 단도직입적으로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태인식에 따른 현상적 사실규정이라는 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고 또한 사실규정의 정당함을 임의적인 개념에서 밖에 말할 수 없고 그것의 강요라는 사실 확인은 기만이라는 사실을 성립하게 할 뿐이다.

신학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은 중세에 오해되어지고 잘못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이 있게 되었는데, 실상은 그들은 하나님의 실재라고 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따라 존재증명이라는 개념을 따르고 있는 잘못을 범하고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론적 실재규정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규정으로써 플라톤이 찾지 못한 것으로 진정한 사실규정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각주5) 에드문트 야코비, 클라시시커 50 철학가,안성찬역, 해냄 p. 36.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저 유명한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이 말의 의미는 철학은 우리를 엄밀한 과학으로 이끌어야 하며 그것으로 소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우리에게 그 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철학은 엄밀한 수학에서 시작해야하지만 궁극적으로 개념을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시인의 언어로 암시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다시 말해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 사유의 피안에 존재하는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 : 한 때, 철학의 종언을 말하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입장 해석을 야코비와 같이 플라톤의 개념의 실존을 찾는 가운데서의 새로움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의 철학의 종언에 대한 해석적 사실을 재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서양철학의 전반적인 사상의 실험이 끝나고 가능성의 실제적인 개념의 보편에 따른 재구성적 실험의 가능성을 의지할 뿐인데, 이미 그 개념적 실존을 찾는 것에 대한실패의 선래는 그 가능성에 대한 불가능을 선포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영원회귀적 개념에서 본다면 '개념을 찾지 못한 실패한 가능성의 영원회귀'라는 것의 반복실험밖에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러한 개념에서 해탈적 개념, 개념의 실존의 탈존이라는 것에서 말한다 하여도 그러한 탈실존이라는 것도 역시 가능성이라는 실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범주의 영향아래 여전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그 설득력의 사실을 지적할 수 더욱 있다는 것이다. 해탈의 종교도 역시 해탈의 사실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기만속에서 자기를 달래는 임의적 행동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의 실재로서 인간의식이라고 함을 말함'(가능성,장영란,이대 철학과 강의,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단편논문)산해출판참고),과 그러한 실존으로써의 사상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구교의 입장이 되어질 수 있는데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시간의 실재론을 말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인식임을 기억할 때'(소광희,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p. 226.*)에 여전히 분별없는 가운데서 신학적 실재론을 잘못되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인식의 정직함이 결여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 안에서 그것들 중에 그들의 실재관과는 다르게 해석해서 실제 사실로서 받을 수 있는 기준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적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실제규명으로서의 신학이다.

*표의 내용 인용

'있기도 하고 있지않기고 한 것으로 합성된 것(즉 시간)은 온전한 실재성(實在性)을 가질 수 없다. 이점에서 시간은 운동과 같다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 전체로서 있거나 부분으로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지금'은 (존재와 비존재로 합성된 것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으로 분활될 수 있다.'(소광희,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