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23, 2006

누가 '실제상황'을 말하는가..

요즘에 언어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그러한 자들이 있는 것같아서 씁씁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라는 말..

비록 철학적인 개념으로 규정되어지는 말로서 차용되어진 언어 '실제'라는 말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의 거룩함이나 인위적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함을 말하게 되는 당위성에 따라 차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말하기 전에 그만한 실재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실재론에 대한 부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규정되어질만한 '실제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상식적으로도 당위성을 말할 수 없는 몰상식한 가치평가절하되어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씁씁하게 하고 답답함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채용되어질 수 있는 언어로서 실제라는 것은 사태라는 것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언어입니다.


'사태'라고 하는 것은 어떤 되어지는 일들의 형태와 그것의 인식되어지는 현상적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실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사상가들의 사상들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불가지론'이라는 사상을 피해가는 자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의 객관적인 증거를 하나 들어보라고 하면 그것은 500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라는 타임즈지에서 언급한 영국의 '버틀란트 러셀' 철학자는 공공연한 입장에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대부터 소위 '덕'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상대적 유익이라고 하는 것의 타당성을 통해서 학문의 정체성과 사태파악과 사실을 말하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실의 규정적 정당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진정한 사태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실제를 규정하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실제상황'이라고 말하고 있고 있는 천지가 개벽한다는 사람들의 입장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유해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글을 쓰게 됩니다.

철학에서의 언어의 정확한 사용을 추구하였던 비트겐슈타인과 언어놀이를 말하는 니체의 노선에 있는 데리다의 문학적 기교가 비교되어지고 있고 그러한 것이 영미철학 아니 영미 문학가를 말하고 있는 즈음에 영미신학과 철학과 그것에 대한 인위적 비판과 임의적 차원에서 말놀이 하는 식의 임의적 사실규정과 실제를 말해서 자기 배를 체우는 자들의 모습.. 사람을 미혹하고 배를 채우는 모습들이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받으며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진정한 실제상황을 살아가면서 그것에 대하여서는 필요성에 대한 당위성 비로소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고 추구할뿐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답답함의 일막 일장을 기술해봅니다.


마지막 장 마지막 장은 아마도 교회가 진정한 실제와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한 글들로 언젠가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 설 때에 온전히 쓰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그 일막일장의 답답함은 여기까지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