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월 19, 2006

다빈치코드(Da Vinci code)의 거짓됨과 기만성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과 또한 좋은 또는 옳은 것이라는 것과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인기몰이 사상(just as times books)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같아서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씀에 있어서 몇가지 동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당위성을 느끼게 됨에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거짓 사상이 마냥 그러한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기만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답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일반 상식적인 개념에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특정 집단 특히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서 왜곡시키고 피해를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시키고 있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흐려놓는 가운데서 글쓰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함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이 그 글쓴 자를 비롯한 오도되어진 편견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좀더 자유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언을 더한다면 '다빈치 코드'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개개의 문구와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계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총체적으로 그것이 부정되었음에 대한 것을 그 합리성의 정당함이 부정되어 거짓이라고 함의 실체를 지적함으로 글을 한정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1, 기독교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사실이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빈치코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함에 있어서 잘못이해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교회의 교육과 잘못된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과 같이 생각하거나 임의적인 기득권의 사수적 개념으로 일관하겠다는 맹목적인 어떤 피해의식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는 것은 다빈치 코드라는 입장과 그것에 관련된 사상들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본다고 해도 거짓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빈치 코드를 말하는 서양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합리성의 무비판적인 표현이 가능한 '언론 플레이'들이 오히려 책망을 받아야하고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럽 대륙의 합리성의 인식과 합리성이라고 하는것은 실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가운데서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방법 즉 'How'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실재의 여부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따라서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실재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고없이, 합리성에 비로소 따르는 실존에 대한 일방적 판단에 따른 사실성의 개연성으로, 그것도 실재도 아닌 것을 말한다는 것과 그대로 받아들여서 상업화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 특정 집단으로써 우리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의도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특정 집단(우리 기독교의 입장)에 피해를 주는 것을 상업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법적인 소송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빈치코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부정적이라는 임의적 생각으로 자신들의 입장이 상대적인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하여서 열려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수 있음을 인하여서(클릭 본문참조하세요) 그 특정 집단의 편견이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절대의 재가가 있는 절대의 보편성이 있는 증거적 사실이 성립되어지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판단의 범주에서 비로소 기독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여서 그들의 입장을 추구하려고 하겠지만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한 견해라고 기독교측을 편협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자의 보편성의 부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최소한 그 개연성을 인정할 때에는 그 자체적 정당함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적 절대 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결국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또한 상식적인 결론적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도 핑계못하는 복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2,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하여서

어떤 이들은 문학이라고 하는 것 '글쓰기'Writings'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고 허구를 다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의식에 국한해서 쓰일 필요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한정되어진다는 점에서 제한되어진 범위를 가지는 것으로써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윤리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각주1)

그런데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차연이라고 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니체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성립되어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자유라고 하는 것을 방종으로 이해함의 당위성을 말하는 그런 안티적 자유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즉 규정되어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과 그 규정되어짐의 실존이 없다는 것은 항상 동일한 사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함의 자유라고 함에 있어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도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한되어진 윤리적 사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택스트를 해체함에 대한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상대적인 택스트라고 비로소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인식으로써 임의적 메타해석적 인식의 증식을 주장으로 자신들의 안티적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표현하였음에 대한 것을 상대적으로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에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함으로써, 그 택스트는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의 사실적 판단이라는 범주적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감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하게 절대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고 내셨다는 점에서,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만으로써의 해석적 임의성은 그 가능성의 정당함을 따라 해체적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강요적 인식을 구축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임의적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개연적 사실로써 재구성된 것으로써 총체적 부정되어진 상대적 정당성으로써 자존적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사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과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거짓으로써의 것밖에는 실존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학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발생적 학문의 기원과 상관성에서 볼 때에 그 상대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의 판단 범위설정에서 한정된 경계선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윤리적 가치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적 보편의 참된 사실과 타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판단의 범위에 있더라도 상대적인 개별적 특수성도 감안해야 함이 보편의식에 어울리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판단을 내림도 허용되어질 수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개별적 특수성은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그 가치와 사실의 취급에 타당성을 말할 수 있는 한정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자유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계시하심으로써 자존의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된다면 비록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동일한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판단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 상식적으로도 다빈치코드가 상대적인 안티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가지고 비로소 상대적 해석적 당위성을 말하고 공포하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며 상대적일 뿐이라는 불가지론적인 개념에서의 타당성에 의한 기만적인 의지의 표현밖에 안되는 것임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다빈치 코드거짓기만인 것입니다.

특정 집단으로서의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성립되어지지 않는 사실로써의 임의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피해를 입혔다면 사회적인 법적 소송도 가능하고 또한 사실심리에서도 사실이성립되지 않는 안티적 다빈치코드의 반론의 사실들도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일반상식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의 사상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영광을 비로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영광을 가리려고 한 미수적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사실로써도 판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문학계에 '빅뱅'(big-bang)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폭'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러나 빅뱅의 의미가 처음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을 수행적 모순에 따라서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 파편들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때에 그것이 성립이 되어질 수 있지, 이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들은 그 사실의 실존을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실로 보게 되어지는 '자폭'이 어울리는 것임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 앞에서 그 행한 것에 대한 법적인 소송적 입장에서 대응함에 동의하면서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존재의 고민과 변명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 은혜가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문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이해한다면 문학의 독립적 표현과 상관성이해에서 자유와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개념에서의 글쓰기와 해체라는 것의 보편성은 일반적으로 데리다를 비롯한 자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수 있는데 이들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상주의라는 반론이 있다면, 그 '사실우상'이라고 함의 인식적 판단이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 그런 규정은 의미가 없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어떤 문맥적인 규정적 개념의 택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허구와 관련되어서 우리의 삶에 유익할 수 있는 측면을 유도해내는 문학적 입장의 가치과 자유와 보편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되어져야 하고 그것은 윤리적 판단을 받음에 전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문학이라고 함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생성적 과정을 볼 때에 상대적인 보편성에 있어서도 한정되어진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은 니체의 사상을 해석하는 계보 가운데서 파생되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독립성을 말한다고 하여도 비로소 절대적 분립의 독립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상대라는 범주에서는 절대라는 것이 비로소 개념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임의적 허용이라고 하는 것과 절대자의 자기 계시적 나타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상대적 절대라는 개념이 진정한 절대의 실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후자의 입장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한정되어질 수도 있고 그 제한적 범위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쉽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연수의 집합은 유리수의 집합에 포함되어지고 그 유리수는 실수에 포함되어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두 무한집합이면서도 부분집합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연산이라고 하는 것도 제한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합론을 말하는 것은 이미 기호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합리적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과 문학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의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형식논리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과 순서쌍에 따른 경우에 따라 변증법적인 문학적 논리를 펼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학의 자유를 위한 변명으로써의 논리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같이 임의적 자유(freedom)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면서도 자유(liberties)를 말하는 것으로 제한적 윤리와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에 따른 학문의 범주설정이 사실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러한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이라고 함을 의식해야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 범주의 설정이해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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