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9월 26, 2014

이단들의 급급함을 보면서

올해 들어서 이단들로 잘 알려진 단체들이 저의 글들을 특정 사이트 법을 통해 인권침해 또는 명예훼손이라는 명목으로 차단시키고 삭제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비유컨대, 젓갈 맛을 안다고 하면,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것이 하나의 생리인가 봅니다.

그런데, 너무 초보적인 행보에 대해 상대할 가치가 없어보입니다. 자기들이 이단이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 될 것을 또한 반박문을 인터넷에 올려서 표현하면 될 것을 남의 글에 대하여서 제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모습이 참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까,

첫째로 언젠가 밝혔지만 결국 법적인 시비를 가린다면 누가 진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시비는 가려지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말하지도 못하면서 이단 소리는 싫어하고 명예훼손을 말하고 있고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하긴 자기들의 단체의 물질적 이익이라는 개념 하나님을 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얻게 되는 수익에 차질이 생긴다는 현실성이 슬퍼서 그런 것은 이해됩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속이는 것이요 사기가 될 수 있음은 또한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법적인 판단시비를 가리고 부끄러워할 것인가요.. 그만하시지요..

그리고 둘째로, 인터넷 특정 사이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고 다른 모든 인터넷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하시는 것 같아 보이니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검색의 시대인데, 떠도는 글들이 삭제하기 전까지 남게 되는 시대인데, 쓸데 없이 자극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을까요..

요즘은 이단들 중에 신천지 교인들이 더욱 요즘 말로 초딩적 발상과 행보를 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신천지 요한계시록 해부하기 강좌가 보급되고 있기에 그런지 더욱 예민해하는 것 같습니다.

자숙하시지요.. 그런 급급함이 더욱 부끄러움을 가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암튼 연민의 감정도 가져봅니다. 

목요일, 8월 28, 2014

인터넷 글쓰기 문화의 정착을 바라보며

인터넷에 글쓰기와 서적 출판의 자유에 대한 검열이라는 것
아마도 전자가 통제하기가 쉽겠지요.. 출판의 자유는 있으면서
인터넷 글쓰기 포스팅의 자유는 쉽게 통제되는 현실 ...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명예훼손에 대한 소지가 있으면
바로 법으로 해결하자는 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아니면 아니다고 반박문을 내도록 하고
그것에 대한 시비에 따라서
결정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글쓰기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권 침해 .. 그것이 성립되는지
명예훼손이라면 아니라는 글을 적극 쓰도록 하고
서로 논의하도록 해주는 것이 언론 중재의 좋은 것이라고 봅니다.


일방적으로 시끄러워진다는 개념에서 법적인 통제 접근하면
여기서는 건전하고 합당한 비판이라는 개념과 문화가 인터넷에서는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판이라고 하는 것도 근거가 성립되는지 또 성립된다고 보여지는
근거를 제공하면 그것의 시비를 가리고 이후에 법적 처리를 행하는 것
순서라고 보는데, 한국의 일반 포털사이트에서는
그런 배려와 문화를 마음에 둘 수 없는 것인지
아쉽습니다.


인터넷으로 소설과 문학 비평문학적 접근을 하는 자들도 있는데

근거 있는 비판과 합당한 글쓰기
언론 출판 문화의 자유가
인터넷에서도 정당하게 보호되었으면 합니다.







화요일, 8월 12, 2014

중세의 잘못은 과거형이고.. 언어 농담이라..

요즘 새로 선출된 교황님의 한국방문으로 상당히 고무된 가톨릭의 입장과 그에 따른 여러 비난들이 득세함에 대한 기득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교황으로 느껴졌던 분은 아마 베네딕토 16세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한때 긴장한 적이 있습니다. 학문적 깊이와 소신에 대한 것에 있어서 상당히 긴장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그런 것을느끼지 못했습니다.


한 국가의 원수로서 교황의 방문은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의 증거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함니다.


아마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에 이만한 영광을 볼 수 있을까, 한마디로 모든 영광이 집중되어지고 있는 것에 조심하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위하는 말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표어만큼은 표면상으로라도 가톨릭이 말할 수는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식으로 이야기 해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 식탁의 빈곤이 포장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세가 드높아지는 모습은 이해하지만 무지의 표현에 대하여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중세의 잘못은 과거형이고'..'현대 개신교의 잘못은 현재 진행형이다'라는 표현을 읽었습니다.


아마 영어로 표현하는 가운데서 아이들이 장난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과거형이란 이미 끝난 것이라는 것과 지금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그런 의미의 표현이고 이어서 가톨릭은 전의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개신교의 잘못은 현재 진행형이란 말은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젼히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주목했어야 했습니다.


중세의 잘못은 과거형이다.

이 해석은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미 전제되어진 것이라는 것도 사실상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되어진 잘못은 현제 고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끝이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중세의 사상적 전제 위에 세워진 전통의 가톨릭은 회개의 진행형은 없는 것이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개신교의 잘못은 진행형이다

잘하고 있다거나 잘못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아직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없는 이미 끝난 자들의 모습과 달리, 세리와 같은 자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람들은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서 거기에는 그래도 믿음과 소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 그는 죄를 지을 때도 있지만, 그 죄를 정당화하거나 주님을 이용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그에게는 긍휼이 따른다는 것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언어의 시제를 해석해야지 그 순서가 바낀 가운데 서기관들의 잘못된 전승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같이 식사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바로 중세의 잘못은 과거형이고 개신교의 잘못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된다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 1) 교황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교황이 인정되어진다는 세상의 모순되어지지만 받아들여진 상식적 입장의 기득권에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 2) 진행형이란 개념이 한정적 입장과 만날 수 있다는 점, 이미 회개했다고 하지만 단지 면죄부, 면벌부에 대한 개념만이 중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그러한 것의 잘못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데, '끝'하고 말한다면 코메디에서나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고 3)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결정론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런 시제라는 개념으로 장난이 가능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유희라는 것이 납득 당위성의 재가는 없다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4)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신비주의를 낳고 신비종교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실재론적 개념이 납득 당위성을 입지 못한다면 그 모습은 아주 건장한 사냥을 잘하는 에서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참고 5) 실재의식이 납득되어질 수 있는 중심을 가진 자가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시복에 많은 사람들의 영광이 드러나겠지만 글쎄요. 지나는 바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볼 수 있는 눈이 주의 사랑하는 작은 무리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참고 6) 언어를 막 배우는 아이들의 장난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글을 쓴 것 같네요..^^ 암튼 우리 나라에 오신 분, 아무 사고 없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금요일, 2월 25, 2011

유명론 이해에 대하여

인식의 동향

작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명론적 인식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과 재고찰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환영한다.(각주1) 하지만 여러 관점들이라고 하는 것의 기반에 따른 다양한 언급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을 취하기 전에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재고하지 않고 맹목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해 유명론적 이해에 대한 입장들


1,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영국과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입장을 굳히고 있는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재고를 한다고 할 때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입장과 같은 언어적 전회로서 접근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의 사상의 변화와 같은 맥락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재고는 합당함을 말할 수 없는 합리성의 기술밖에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란 표현과 하느님의 표현에 대해서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각주 2)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은 합목적적이라는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표현과 기술적 자기계시를 하셨다고 해서 상대적 당위성의 판단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상대적 자기계시의 형태를 취하심은 자존의 자기 절대 본래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 3)


2,진화론적 입장에서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라는 글을 쓴 존 티한의 입장은 진화론적 개념에서 즉 종교의 진화론적 개념에서 종교적 폭력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 진화라는 개념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진화에서 종교적 개념을 이야기 할 때에 자연신학과 같은 배경을 언급할 때에 자연(nature)의 개념이 인격화 되어지는 모습과 또한 선택적 개념이라는 것이 종교적 더 나아가서 신학적 선택과는 전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우생학적 선택적 개념과 종의 변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비교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도 진화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에 그 만들어진 신의 개념의 인식의 변화와 그를 위한 정당성을 상대적으로 세워나가기 위해 폭력적 정당함을 취해왔다는 이교적 개념을 말할 수도 있고 기독교적 개념도 유사하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할 수 있음과 정당함이 항상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수행적 모순으로 표기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 비교'라는 개념만으로 신의 이름을 말함에 대하여서 만들어진 신과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동일적 범주로서 인식하는 것은 근거지움이 임의성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종교적 폭력이라는 나열적 역사관의 기술보다는 신에 대한 인식의 납득 당위성을 재고한 다음에 이해의 규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사유의 순서가 될 수 있음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예상할 수 있는 입장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개념은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가운데서, 유명론과 상관없는 존재론으로서의 과정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범신론적 또는 범재신론적 개념의 존재자를 상정해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실재론 즉 하나님의 이름의 자기 계시를 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이견을 말하는 경우이다. 유대인의 경우는 예수님이 선지자로서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신으로서 자의식이 비로소 발생했다는 자유주의 신학적 개념도 볼 수 있다.(각주 4)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과정적 입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적 접근에 대하여서 반대할 수 있는 인과적 매력적 합리성의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각주 5)과 또한 여러 학문적 기술의 풍요를 말해줄 수 있는 것과 같은 보편성이 재고될 수 있고 또한 메시아도 그의 인식도 과정적 산물이라는 개념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목적적이냐, 인과적 합리성으로서의 존재이냐는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실존으로서, 배타적이라는 개념의 판단까지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논의 범주적 모순이라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으로 본다. 물론 배타적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그 상관성도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관성의 사실을 그 실제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도 다시 사유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볼 때, 그들의 사유의 미숙도 재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론과 실재론 이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는 말이 있다. 초기 구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언급을 철학적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에 반대되는 가운데서, 유명론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름뿐이다는 것이다. 유명론은 튀빙겐의 설립자에게서 볼 수 있고, 마틴 루터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유명론적입장이라는 구교의 실재론적 입장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실재론에 대한 명확한 것은 후에 숙제로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명유실(有名有實)을 말하고 있다,(각주 6)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의 실제적 객관적 근거지움의 핵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에 대하여서

신학의 향방을 생각한다. 교회사에서 합리성에서 당위성을 말할 수 있기를 원했고 그것은 변증적 입장을 취하게 되며 헬라적 합리성의 차용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재론을 말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원하지 않는 이들은 그냥 존재론으로서의 모습을 말하고 형이상학적 개념을 통해 표현하기를 원해왔다.

신존재증명과 같은 개념들, 신학적 개념과 철학적 개념을 나누어서 변명하는 경우도 있고, 합목적적 합리성에 대하여서 인과적 개념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그 인과라는 과정적 개념의 신학적 개념과 진화적 개념의 상관성을 말하는 경우, 이 합리성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찾아왔다.

그러나 합리성 그 자체는 비로소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말할 수 없는데, 그 합리성의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마음에 둘 때에 그 고통의 끝을 말할 수 있고 핑계치 못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될 것으로 말을 맺는다.

이제는 당분간 신학의 향방은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으로 교회사와 신학의 재구성이 요청되며 신학의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야 함을 마음에 두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언어적 전회, 진화론적 입장, 기타 과정신학적 입장의 인식과 존재에 대하여서는 합리적 근거지음의 객관성은 주장할 수 있어도 그것의 타당성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범주적 오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납득 당위성의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들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두며, 아울러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유명론은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 자체임을 기억하고, 합목적성과 인과성과 같은 범주로 분리하여서 상대적 당위성을 찾기 보다는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본래적 정당함과 납득 당위성의 본래적 정당함을 의지하여야 함이 신앙인의 본래적 모습과 사유의 실제임을 말해둔다.























각주1) '예수 철학'이라는 가톨릭 측에서의 책이 출판되어 있고,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에서는 존 티한의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라는 책이 출간되어 있다. 기독교 측에서도 어떤 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의 문제점이라는 식의 주제의 글을 쓴 책이 있다. 즉 하나님이란 표현이 합목적적으로는 하느님이란 말보다는 맞지 않다는 식이다. 본 나의 글은 이런 입장들에 대하여서 간단한 입장 정리와 또한 사유의 향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정 짓도록 하겠다.


각주 2) 언어적 전회라고 할 때, 분석철학적 언어로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적 개념의 철학적 탐구의 입장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원자와 같은 핵심 요소의 단어들이 바르게 배열되어서 문장이 형성되고 그것이 실재를 그려내는 놀이에 비교되는 것이 이후에는 합목적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측면의 터닝적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는 점과 그 앞서 유일신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삼위일체를 의식하는 엘로힘의 경우로 볼 때는 합리적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선교나 다른 사람들의 이해도를 고려하는 합목적적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느님'이라는 말이 더 요구되어진다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즉 단어의 이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합목적성이라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측면의 당위성을 따르는 것이 영미철학의 분석적 경향의 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셈족의 언어적 입장에 대하여서는 그 이름의 실재적 정당함을 실제적으로 자존적 정당함과 그 본래성을 또한 납득 당위성을 스스로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 합목적적 개념에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셈족적 개념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그야말로 철학적 형이상학을 통한 안경을 따르는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자기 모순적 비판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실제관을 이해하지 못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 3) 물론 '절대'라는 개념을 상대적으로 변함이 없는 결정론적 개념 고정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옥스퍼드 사전적 입장에서도 그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라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그런 배타적 판단의 형태적 인식의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또는 실제적인 현실적 표현이 있다는 측면이, 자존의 절대자라는 자기 계시를 비로소 전적으로 묘사를 잘한 것으로 객관적 근거지움의 확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철학적 입장에서는 언어적 표현과 접근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앞서 그 실재의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진다고 할 때에, 합리성의 굴절로 인한 모순이라는 개념의 당위성으로 인식의 전환과 실제의 현실태적 규정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합목적적이 아니라는 측면, 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이름에 대한 판단함은 가능하지만 납득 당위성이 본래적 정당함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래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정당함을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영원의 속성적 차원에서 정당함의 본래적 실재도 스스로 취하실 수 있고 또한 본래성도 스스로 취하실 수 있는 것이 자존자의 자기 신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적 한 표현을 취하셨을 때에, 왜 그러느냐 심지어 배타적이지 않은가라는 개념도 표현 가능하지만 그 가능하다는 것으로 그 본래적 당위성을 상대적 당위성으로 판단하겠다는 성립될 수 없는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당성 타당성의 본래성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에게서 그 실재를 말할 수 있을 때, 상대적 합리적 타당성이 정당성으로서 자리잡으려 한다 해도 그 실제는 임의적인 것으로서 비로소 그 정당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잠잠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의 실제를 여기서 본다.


각주 4)마지막 메시아의 인식의 경우 즉 메시아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발전해서 자신이 메시아인 것처럼 알았다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게할더스 보스의 '예수의 자기계시'에서 여러 경우를 말하고 있다.


각주 5) G.H. 폰 리히트, 설명과 이해,서광사p.16, 각주6과 7을 참고


각주 6) 이렇게 말함은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의 내용 속에서 볼 수 있다. 풍요의 축복받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데 셈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적 축복이 하나님의 이름 신명의 유명과 만남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7월 25, 2008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인터넷에 대한 견해 표명에 대하여

작금의 현실에 대하여

인터넷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의식하면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겠다.(각주1) 사태이해에 있어서 정치적이면서도 문학적이면서 그리고 신앙적인 면들과 같은 여러 가지 종합적 인식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각주2) 이러한 가운데서 세계적인 문호 움베르트 에코의 발언에 즈음해서 신앙인으로서의 입장 표명도 열려져 있고 오히려 개인적인 언급이 되면서도 실제적인 우리 국가 국민의 객관성을 취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의 여론적이든, 사유의 소여에 따른 것이든, 언급하는 바는 인터넷 실명제가 사실상 필요하며 적절하고 정당하다고 하겠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이해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언급은 다분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강요적 인식이 있을 수 있는 사태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인식의 보편성이라는 시선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열려 있는 자라면 그런 사태인식의 강요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개인적인 입장표명에 대하여

글쓰는 이의 한정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 더 나아가서 진실에 대한 이해의 게임이론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각주3) 그러나 실제의식의 시선이라고 함의 차이에서 실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을 함에 있어서 그 정당함은 상대적으로도 허용되어지고 더 나아가서 인식의 요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론

인터넷에 대하여서 어떠한 정체성적인 인식이 합당하며 또한 어떠한 방향에서 그 문화적 한 요소로서 유익을 말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서 논하고자 한다.

움베르트 에코의 발언에 대하여

움베르트 에코의 인터넷에 대한 언급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이러한 움베르트의 단언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가 기호학자로서 논리학자로서 문학자로서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기호학적인 측면으로 읽는다면, 그가 뜻하는 바와 달리 해석적 기의라고 하는 것이 재미있게 여러 인식을 자극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제일 처음에 에코의 입장을 담은 글을 본 것은 서점이다. 즉 이것은 서점에서 판매라고 하는 합목적적 개념과 이익이라고 함의 파생적 입장을 고려하여 그 기표로서의 그의 언급을 읽고 재생산적인 표현을 하고 있고, 또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터넷 문화가 필요없다는 것과 같은 입장에 반감을 느낄 수 있는 기표이고, 반대로 인터넷 실명제를 옹호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문화에 대한 배격이나 제한되어질 수 있다는 것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입장의 기표로서 그의 언급을 읽을 수 있다.

글쓰는 본인은 그 여러 기표를 읽은 기의적 당위성을 말함에 있어서, 후자의 입장이면서도 좀더 재고가 필요한 언급이라고 하는 기표로서 판단함과 기의적 기표를 하는 주체로서의 에코의 입장과 인식에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과 또한 건설적인 인터넷 문화에 대한 신앙적 입장 더 나아가서 일반 문화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안을 생각하지 않은 비판에 대하여서

대안이 없는 비판은 상대적으로도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판단에서 본다면, 에코도 그 판단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간단한 인터뷰에서의 그의 실제적 기반의 입장을 분명히 전제할 필요적 당위성이 요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면 일단 비켜갈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글쓰는 자로서 에코의 입장은 부정적 개념에서 한정하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글들과 문학적 글들과 실제적 입장에서 기술되어진 객관성 있는 글들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검증이나 객관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닌 주관적 필요에 따른, 그가 볼 때, 얕은 합리적 표현들이 식상해지고 또한 그것이 현실적 객관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시간이 지난 후에 재고되어지는 사실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보편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표현과 같이 '멍청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신앙에 대한 그의 언급에 비교하며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인식과 인식론적 규정의 주체의 신념에 따른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에 따라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한정적이라고 해도 실제적인 것에서 사실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대 문호 에코의 그의 인식주체로서의 학문성과 그에 파생되는 객관적 근거지움에 앞서는 그의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존중과 함께 재고되어질 수 있는 비판도 존재한다는 것이 글쓰는 본인의 입장이다.

에코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가톨릭 추기경과의 대화가 있었다(각주4)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보편이라는 개념을 신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흐지브지하게 여지를 남기는 가운데서 대화를 마치고 있다. 이것은 신의 개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의미를 부여할 만한 대화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보편이 신인가?, 신은 보편인가? 잘못된 신인식에 대한 개념없음이 인식의주체로서 아무데나 신의 이름을 또는 신이라는 애니미즘적 개념의 범신적 신이 진정한 신인 것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풍부한 합리적 기교와 표현들이 식상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 보편적인 것을 신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그러한 입장에서의 기의를 목적으로 하는 기표적 표현은 문제제기의 실제성을 말하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방향성에 있어서

에코의 실제의식이라고 함에 따른 객관성에서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함과 비난적 입장을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신앙인의 입장과 더 나아가서 일반 국민으로서의 모습에서는 그것을 선히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기에 기도하고 구별하여서 선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상식선에서도 객관성과 책임을 가진 것으로서 표현되어질 수 있다면 '멍청이'라고 규정하고 '멍청'하게 인식강요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 유익과 객관적인 측면을 항상 생각하여 책임있는 표현으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좋은 문화로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책임성을 바탕으로 하여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떳떳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실명제가 성립되는 것이 옳다는 것과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요즘에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에 관심이 모아져서 이런 언급이 나왔지만 거의 8년정도 전에도 인터넷의 실명제는 언급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객관적인 쟁점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표현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책임없는 방종적 개념의 '가면무도회'(각주5)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대 문호 에코의 지적과 같이 '멍청이'가 될 것이다. 어떤 합목적적인 효과를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공공적인 당위성이 재고되지 않는 가운데서는 여전히 '멍청이'로 비난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실제적인 대안으로서는 책임을 전제로 하는 인터넷 실명제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자유로움과 유익의 실제를 누리는 것이 좋은 것이다.



결론

우리 대한민국IT산업의 선두주자로 앞서고 있고 인터넷 영향도 선진국과 비교할 때에 가히 평가절하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기득권을 가진 나라에서 인터넷 문화를 바르게 정초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귀감이 되어질 수 있고 또한 우리 다음 세대의 건전함과 유익을 위한 앞선 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함의 선함을 말할 수 있다.

익명이라는 측면의 유익성을 전혀 배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는 개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자기 표현에 자기의 존재적 입장적 책임을 가진다고 할 때에 그 표현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지만, 속된 표현으로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객관성을 부여하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그 자유라는 개념은 채색되어진 이기적 편협적 주장으로서 그것을 일소함에 있어서 당연함이 요청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지는 남아서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배려는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전반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분명한 한정 안에서, 그것도 극히 제한적으로 요청되어질 뿐이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문화를 선도해가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도 책임과 그 책임 안에서 자유와 발언권이 형성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서 좋은 문화를 선도해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중심으로 한 작가의 견해를 통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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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인터넷이 주목받게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에 지난 16대 정권의 탄생을 계기로 보여지며 현 17대 정부에 들어와서는 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견해표명이라고 함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각주2) 시대적인 측면에서 사태이해를 생각한다면 다분히 인터넷의 영향은 정치적으로만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16대 17대 정권과 상관없이 인터넷 문화 초기부터 실명제에 대한 인식은 있어 왔다는 것에서 현실을 위한 언급보다는 다른 합목적적인 사태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객관성을 위해 실명으로 글을 써왔던 본인으로서는 안티적 입장에서의 사람들에게 당당한 합리적 논쟁을 위해 자기 존재적 입장의 분명함을 위해 실명으로 글로 토론을 제기한 바가 있다. 신앙의 안티적 입장에서는 난색을 표한 바 있고 인터넷의 익명성이 보장되는데 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측면을 말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번 정치적 측면에서도 같은 정황적 입장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체 행동권을 행하는 경우는 기독교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국가가 관여할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질서를 따라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

개인적으로, 종교와 정치에 대한 관계에서 톨레랑스 적인 입장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될때에 민족적 개념과 정치적 관계성이 있어야 했던 인식의 모순들이 교회의 일반적인 속성인 것과 같이 잘못 알아서 정치적인 것이 기독교인 것과 같이 잘못된 인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고, 진리문제가 아닌 이상 교회의 집단적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옳고 개인으로서의 성도가 정치에 부름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정치를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며 국민으로서 기본적인 참정권을 생각할 때에 자연스러운 정치적 입장도 언급할 수있는 가운데서 참여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각주3) 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논고-김운비 이학사 pp. 147-157 참조
폴 벤느는 여기서 '역사가도 자신의 프로그램을 벗어나기 어렵다'라는 논제를 다루고 있다. 즉 글을 구성한다고 할 때에 자신도 그 구성함에 있어서 판단을 받는다는 점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래도 구성적 당위성은 인정될 수 있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에 관한 언급을 한다는 것은 사태라고 하는 현실적 입장의 판단이라고 함의 구성되어질 수 있는 여러 말들의 판단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도 정당할 뿐 아니라 일반 한 국민으로서의 언급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연성을 갖춘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이글을 읽은 독자의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의 인식주체라면 인정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각주4) 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대화- 이세욱 열린책들

각주5)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persona라는 말로 표현되어진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가면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삼위 위격에 대한 것도 하나의 측면정도로 잘못 이해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사람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보다는 가식과 꾸미는 것과 숨기는 것이 더 인격적 인간적이라는 괘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자신의 정직함을 드러내는 것이 인격이라고 함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앞서 가면쓰는 놀이로서의 '익명'은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더욱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정직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를 상관하는 그러한 실체로서의 인격적인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합당한 겸손의 실체로서의 이 말을 쓸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persona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으로 의롭다는 실체의식을 갖게 되는 성도들과 일반은총적인 측면에서의 사람들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의 의식에서도 실제화된 정직함의 사실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재가와 그에 따른 일반은총적인 사람들의 인식의 느끼게 되는 당위성에서 자기의 실재를 드러내는 진실함에서 인격을 말함을 마음에 두게된다.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맹목적 인본주의적 개념에서는 글자의 의미에서 임의적으로의 해석적 뜻함을 실제화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생으로 납득 당위성을 본래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월요일, 6월 09, 2008

To Sam Harris

글을 씀에 있어서

이 글은 '샘 해리스(Sam Harris)'의 글(각주1)에 대한 답장으로서의 글이다. 오랫만에 참으로 '인내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인 이 책에 대하여 답장으로서의 일반 서평적 글을 쓰려고 한다.(각주2)

필자는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 저자 샘 해리스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고 또한 한 사람의 무지한 희생자라는 측면에서 측은한 생각이 든다.(각주3)

그의 보내는 방식과 유사하게 한 명으로서의 무신론적 입장인 저자에게 보냄으로써 전체 입장을 같이하는 분들에게 답장으로써의 글을 쓴다.



본론

1. 신학 사조와 작금의 비판적 배경이해

이와 같이 무신론자들을 비롯한 과학주의의 도전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신학사조의 변화에 따른 경향을 말할 수 있다. 현대 신학 사조에서 신복음주의의 실패라는 판단이 있었다.(각주4) 이러한 것에서 그 증거의 동일성과 사실성이 다른 성경과 과학의 조우라는 것이 준비되었는데, 그것은 신복음주의에서 과학에 답변함에 있어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과학이라고 함에서 종교를 판단함이나, 성경이 과학과 대화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그러한 대화의 노력이 있게 된 것인데, 여기서 과학이 더 자기 중심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2. 성경의 자증(autopistia)과 인문학에 대해

신복음주의의 실패라는 평가가 있는 가운데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인문학적 바탕을 참고로하는 학문적 노력이 있었다. 그러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이루어진 논문들과 편집본을 접할 수 있다.(각주5)

이러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는 신복음주의와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과학적 또는 수사학과 같은 인문주의적 개념의 도입을 시도하는 것이었다.(각주6)

좀더 언급한다면, 어떤 이들은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실제적 입장을 마음에 두지 않고는 그 표현적 입장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즉 공허한 개념으로서의 언급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 자기계시에서는 자존적 하나님의 실재론적 증거로서의 성격을 가진 계시로서의 '스스로 증거하는 성격'으로서의 성경의 자증(autopistia)이라는 영원적인 주어진 본래성을 가진 것으로 기록된 성경 계시가 나타나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구성적 정당함을 스스로 구별하여 실재하시는 방식으로 계시는 일반 책들의 인식적 구성주의와 달리 특별(자존적 정당함에서의 실재와 실제의식으로 분별하는 사역에로의 부름을 받은 자들의 평범한 행보의 섬김이라는 특별)영감으로 인식적 구성을 통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그러함을 근거로 계시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면 상대적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동일한 정당함 속에서 사실을 분별할 수 있는 권세가 성도들의 인식에 주어진 것이며, 사태에 대한 인식에서 사실을 말씀의 본래성의 재가에 따라 진정한 사실로서 증거하는 것이다.(각주7)

물론 이러한 신학적 사실에서 인문학 자체도 그 사실의 당위성에 따른 그들만의 보편의식을 허용적 당위성에 따라 말할 수 있음에 따라서 그 학문의 영역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범위에서 새롭게하심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각주8)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 비단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주체로서의 사람들의 인식의 새롭게 함에 대한 것에서 비롯되어진 현상적 판단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분명한 언급을 할 것은 중세와 다른 점에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중세의 신관은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보편성을 하나의 여럿 해석적 가능태들 중의 하나로서 생각하는 하나의 상식보편적 개념 또는 철학적 보편적 특이성의 보편성을 의지할 뿐임으로 인해 억압하는 고정시키고 인식의 주체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중세의 암흑기라는 합리성이 있으면서도 실족으로서의 합리성으로 나락의 길을 걸어왔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3. 합리적 이성과 논쟁의 성립과 종결

1) 합리적 이성이란 무엇인가?

저자 샘 해리스는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합리적 이성이란 표현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주관적 근거지움을 최소한 객관성을 가진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실제적 기준이 있는가에 대하여서 답변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과학적 합리성과 그 확실성이 있음을 저자는 인정하지만 그것도 역시 모순, 파라독스는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어떤 한정적 개념에서의 최소한 토론적 보편적 입장의 동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간과하고 있음이 아쉽게 여겨진다.

굳이 지적한다면, 샘 해리스는 통계적인 조사에서 상당한 객관성을 취하고 있고, 수학적 입장에서 언급될 수 있는 입장도 언급이 있었고, 신화라는 개념도 역시 모순이 있을 수 있는 개념에서 취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 그는 그 모순의 판단을 받지않을 만한 보편적 인식을 동의없이 기준으로 삼고 있음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주관적 지혜로움으로 주관적 편협합의 객관성으로 정직을 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할지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의 '이야기 파라독스'(각주9)라는 책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책의 내용에서는 논리, 기하, 수, 통계, 확률, 시간의 파라독스 몇편씩 다루고 있다.

특히 신앙에 관한 통계라고 할 때에도 그 신학사조에 대한 참고 없이 단순한 통계를 기준으로할 때는 그 통계표본자료 등과 같이 잘 설정되지 못함에 따른 결과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신앙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른 사실의 정당성을 마음에 두는 신앙의 기본적 입장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설득력을 표방해도 납득의 당위성은 상실하는 모순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에서 주장에서 모두 그 존재 자체를 기각하도록 요청된다고 하겠다.

2) 과학적 이성에 대하여

과학적 이라는 것도 논리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도 그 객관적 사실의 논의를 위한 근거지움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존재적 당위성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과학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의 운동을 필요로 하는 계기적 인식을 마음에 두게 되는데, 과학에서 전제되는 시간적 모호성과 개연성은 한 예로서 '뉴턴의 절대 시간관'을 들 수 있다.

즉. '시간과 시간의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이 공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1분에서 2분 사이 그리고 3분에서 4분 사이의 간격이 동일하게 시간간격으로서 1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일반적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보편적인 역활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 간격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열려진 사고가 요청될 때에는 과학의 사실 규정은 사실로서의 근거지움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사고가 되지 못한다.

3) 신화적 기독교 이해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마틴 가드너의 시간의 파라독스에서도 주목할 수 있듯이 시간의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결정론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측면을 말할 수 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단위 측정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즉 연대의 측정은 방사능 동위원소의 반감기에 따른 것을 기준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는 탄소동위원소를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다른 동위원소로써 측정은 시간 측정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과 시간인식이 그리고 달력에 대한 이해도 역시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틴 가드너가 소개한 시간의 내용의 파라독스 중에서는 결정론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있는데,(각주10) 여기서는 결정론이라는 것을 좀더 생각해보면, 시간의 단위가 경험되어진 가운데서 현실적 시간으로 현상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지구의 연대를 지질학적으로 측정할 때에 성경의 연대와 잘 맞지 않고 더 오래된 것으로 나온다고 할 때에 시간의 파라독스에서 보게되는 결정론적인 개념에서는 '천만년'이라고 하는 것의 시간의 흐름이 현실에 지금으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천만년 같이 지질연대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바로 어제의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시간의 모순의 한 예가 될 수 있고 이것은 결정론에서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

연대적 개념으로 성경의 모순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이처럼 시간의 철학적 결정론과는 다른 것이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도 창조의 개체로서 받을 때에는 시간의 파라독스라는 영역에서 예정론을 비로소 다룰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샘 해리스는 '빈티지 출판사 판본에 첨가된 후기'(각주11)에서는 신화의 발생과 기독교의 발생에 유비적 개념으로 신화에서의 비윤리적 개념을 기독교에 전이적 개념으로써의 이해를 강요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이것도 유사비교와 동일비교의 차이점을 관계의 보편성을 임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에서 비롯된 인류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불가지론은 사실을 말하기에는 그 보편적 근거로서의 객관적 근거지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앞선다는 의식'에서 정당함을 찾는 보편인식에서 비롯된 가운데서 사실 비교를 말할 때에, 사람들의 인식과 구별되어진 인식의 차별성과 독립성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적 사실성을 말함을, 일반 상대적 시간적 보편 인식에 따른 상대적 인식의 연속성으로 임의적인 규정하려고 하는 신화와의 비교 판단 시비는, 앞서 언급한 자존의 하나님의 구별적 재가에 따른 자존적 절대 보편의 재가된 사실 시비에서, 기독교 신앙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기각됨을 말하게 된다.

일반 시간의 보편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보편성에서 재가받은 보편성으로서의 시간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기각된 샘 해리스의 임의적 합리성은 기독교 신앙을 비로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 그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대니엘 데닛의《마법 부수기 Breaking the Spell》, 리처드 도킨스의《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크리스토퍼 히친스의《신은 위대하지 않다》이런 책들도 객관적 근거지움을 위한 보편으로서의 개념이 상대적인 보편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원 보편을 절대 합당함으로써 취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무한이라는 보편의 창조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터툴리안은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닷물을 다 마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해수욕장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건강을 위해서 바닷물을 마셨다는 야사를 전하는 이도 있는데 글쎄, 증명의 개념에서는 터툴리안의 견해가 따를만 하다고 하겠다.

물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에 앞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받으시도록 함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재해석되어진 가운데서의 그의 입장을 통한 언급임을 말해둔다.

합리성과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것과 그로 인한 사태인식을 할 때에 더 나아가 그것을 재가할 수 있는 보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해두는 것은 그 모든 노력들도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상대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의 복음은 핑계치 못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하며 그 이름의 영광을 돌리시는 자리에 모든 이들이 서시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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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Letter to a Christian Nation Copyright ⓒ2006 by Sam Harris

각주2) 글을 쓰는 도중에, 샘 해리스를 '저자'라는 호칭을 쓸 것이고, 이글을 쓰는 나는 '필자'로서 혹 표현하게 될 것이다.

각주3) 개념도, 고민도, 체계적인 측면에서 언급도 아닌, 놀란 이성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한마디로, 건방지다는 판단하에서 자신을 노출시켜야만 하는 고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것은 편지글이라고 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기독교 국가에 보낼 정도의 중심을 가졌다면, 잘 준비되어지거나 좀더 전제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마땅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칼 야스퍼스의 '척도를 주는 인간들'정영도 세종출판사과 같이, 어떤 인식론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에 당위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공개적으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아직 조심성이 결여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더욱 그러한 실재적 기준이 결여된 가운데서 정직이니, 윤리적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고 있는 것을 볼때에 식상해진다.

그리고 비판을 할 때는 여러 기독교 종파들과 그 차이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비판해야 할 것인데, 각 문화와 각 나라의 신학적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의적으로 말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란 이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의 책(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p.106)에서 저자 자신이 언급하는데, 무슬림의 공포와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라고 함을 언급하는데, 사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면 뇌의 호르몬 분비에 따른 합리적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런 기본적인 재고사항을 갖출 수 없었던 자의 모습과 그러한 가운데서의 건방진 모습도 이해가 될 수가 있었으며, 그래도 무슬림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하든 보낼 희망이 없든, 기독교에 대해서 만만히 보든, 그래도 기독교에 답변을 구한다는 측면도 해석 될 때에 그 연민을 마음에 둘 수 있었다.

존 로크나, 키에르케고르도, 대중의 무지에 대하여서 상당히 식상해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입장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그런 저자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다. 개념정리와 숙고가 요구되어지는 자에게 유수한 대학들의 학문의 거성들이 추천하고 있는 것이 선동에 밀린 한 순진한 분의 희생을 보게 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글을 쓰게 됨이 유감이다.

각주4) 간하배, 현대신학해설,개혁주의 신행협회 pp. 180-190.
신복음주의 - 그 실패(Neo-Evangelicalism-It's Failure)를 언급하는 가운데, (성경을 연구하자는 노력이라면 장려해야 할 일이나, 이 토론의 진로는 순전히 유익하지를 못했다. 램과 카넬 등은 과학과 성경의 관계를 많이 취급하였는데 과학을 성경의 빛에 의하여서가 아니고, 성경이 과학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는 인상을 남겼다.(상게서 p.185)

각주5) 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INERRANCY AND HERMENEUTIC, A Tradition, A Challenge, A Debate edited by Harvie M. Conn. Coppyright 1988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49516, America 1991.

각주6) 이것을 반영하는 증거로서 상게서, 성경무오와 해석학에서는 편집자 간하배(Harvie M. Conn)의 언급에 주목할 수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자증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한다. 성경의 권위로부터 해석학으로 운송되었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다시 해석학으로부터 성경의 권위로 되돌리는 것이다.(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pp. 36-37.)
그리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입장을 따라서 방법론으로서의 인문학을 선택함을 이렇게표현하고 있다.
'Cornelius Van Til이 애용하던 강의실 표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사명은 suaviter in modo (방법론에서는 너그럽게) 동시에 fortier in re (진실에 대하여는 엄격하게)가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목회적 대처에 대해 어떤 근거를 끌어낼 수 있을까? 보수적 충정과 재구성되는 해석학에 대한 진보적 관심 사이에 최소한의 공동의제라도 있는가?'(간하배 편집, 성경무오와 해석학, 정광욱 옮김 엠마오. 1992. p. 36.)


각주7)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그 본래성과 그 본래성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 영감은 그 자증하는 성경의 재가라는 차원에서 영감은 'Infallible'(완전영감)이 되는 것이다. 즉 이 완전영감(Infallible Inspiration)에서 축자영감(INERRANCY)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축자영감 자체로서의 영감을 의미하는 것은 소위 '글자놀이', '언어놀이'라는 모순에서 자신을 찌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도들이 성경대로 우리의 존재의 실존과 성경을 통해 해석되어진 삶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이, 줄로 재어준 구역으로써, 진정한 나의 삶으로서 실로 아름답다고 고백하게 되며(시 16:6) 그것은 진정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심에서 성경해석과 인용에 대한 당위성을 임의적 형식이면서도 재가되어진 인용을 하는데 반해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경솔함으로써 건방진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저자의 글에서 읽을 수 있고 식상하리만큼 성경을 그 본문의 정황의 고려없이 나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에 대한 납득하지 못한다고해도, 최소한, 이해없이 임의적 언급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물론 누구나 경전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와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p. 126.)

각주8) 작금의 인식들을 볼 때에, 무엇인 진정한 사태인식에서 사실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서 불가지론과 무신론적 인식으로 고통할 수 있고 단지 철학의 변형이나 개조를 통하여서 보편적인 것을 동의하는 가운데서 개념의 설정과 그 판단에서 객관적 근거지움을 통해 사실을 말하는 정도이다.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대속의 범위와 학문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죽느냐 사느냐는 실존의 상대성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하는 것과 그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고 할 때에 재가받는 사태인식은 사실로서의 정당한 사실로서의 실존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들의 실재성의 회생으로 인해 사실이라는 기반으로 학문적 실체의 본래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만물을 새롭게 하심의 뜻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사태인식으로서는 별 차이가 없어도 실제라는 측면은 그 판단을 받지 않거나 또는 그 판단과의 상관성을 풍성하게 한다.

각주9) 마틴 가드너, 이야기 파라독스, 이응신 옮김 김운용 감수 사계절 1997.
Martin Gardner, la magie des paradoxes. 우리 말로 직역하면 '파라독스의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10) 마틴 가드너, 이야기 파라독스, 이응신 옮김 김운용 감수 사계절 1997. pp. 239-240.

각주11) 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박상준 옮김 동녘사이언스 p. 107 이하.

금요일, 12월 14, 2007

'언어의 침식'에 대해서

글이나 어떤 사상에 있어서 해체를 말한다고 할 때에 철학자 데리다를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일단 글쓰기라는 것으로서 접근해야 함을 주장하고 또한 그 쓰는 '언어의 침식'이라는 것으로 전통적인 사상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말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침식이라는 측면의 입장이 진정 당위성을 본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된 답변이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그의 고민은 의미적인 측면에서도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본래성에 대한 해체의 '잘됨'이라는 것의 해체적 당위성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이 마련되지 않는 한 성경에 대한 합리적 해체라는 것의 잘됨의 실존적 해체는 그 자체가 해체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성경의 언어와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기술이면서도 그 본래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에 따른 동일하면서도 다른 범주적 설정에 따른 것으로서, 자존자의 자존적 정당함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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