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6월 13, 2007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주장이나 그에 따른 글을 씀에 있어서 두 가지 '수행적'모순이 있다고 하겠다. 그 하나는 임의적 실제의식에서 '어원고찰'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또한 임의적 실제의식에서 비롯되어지는 '안티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직' 그리고 '이미'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개념의 정리라는 것이 모호한 가운데서 '객관적 근거지움'을 위한 노력들이 시대의 정신들의 특정적 기득권 의식을 가진 '다수'라는 '소수'의 개체에 의해서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이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있으나 그것이 기만으로서의 행보를 나타낸다면 그 폭력성과 기만은 그 시비를 거쳐서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론

한스큉의 명제에 대하여

가톨릭 신부로 남아있는 한스 큉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은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킨 것으로 보여지고 또한 심지어 기독교 즉 신교에서도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적 현상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은 재고되어야 함이 옳다고 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톨릭을 비판하여서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톨릭 본연(?)을 의도한다고 하지만 한스 큉은 그것을 말할 수 있었으나 진정 교회의 존재와 모습을 말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한스큉은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서 아주 잘 비판하고 잘 기술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 교회의 모습으로서의 그것을 잘 기술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명제로서의 '예수는 가톨릭 신자였을까?'(각주1) 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스 큉 그는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그 '원칙적'이란 말이 역은이의 기술적 표현인지 아니면 한스큉의 본래적 자기 표현인지에 대한 논의를 생각할 여지도 있고, 그런 가운데서 그 원칙을 말하는 그의 보편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 말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서 다음 언급이 진행되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명제로서의 언급에 있을 수 있는 또는 개인적인 예상적 입장의 표현으로써 가톨릭 체제의 모순적 입장을 언급하면서도 개연적 개념으로서의 비판적 모순이 유명무실함에 대한 것으로 다루어 명제의 원칙적 당위성을 손상없이 두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톨릭을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부로 남아 있는 가장 큰 그의 중심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 나는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원칙적 동의를 하는 가운데서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서론적으로 언급한 것 중에 하나와 같이 안티적 태제라는 개념은 객관적 근거지움에 있어서 치우칠 수 있다는 위험성과 그 판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안티'라는 개념도 '본래성으로 구별되어질 수 있다'(각주2)면 그러한 수행적 모순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겠다는 중심에서 이런 태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가톨릭'과 '예수교' 라는 개념적 표현은 아주 반목의 세월과 그 가운데서 객관적 규정적 입장에서 그 차이의 사실을 많이 말해왔다고 할 수 있다.(각주3) 이러한 예수님께서 '가톨릭 신자'인가 아니면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논의는 그 표현적 어눌함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성립되어지지 않지만(각주4) 그것에 객관적 의미부여라고 하는 것의 실제의식의 판단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곳이 가톨릭이냐 아니면 예수교 즉 기독교로서의 신교인가 하는 것의 판단이라는 실제적 존재 타당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측이 모두 그리스도교로서의 형태적 동등성이 있고 현상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가톨릭이 앞서 존재함에 있어서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득권이 가톨릭에 있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에서야곱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롬 9:13)는 실제의식은 주의 말씀에 따른 것으로 가톨릭이나 신교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일단 전제적 인정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식을 하나님께 두는가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의 유무를 기준으로 보게 되어지며 시간적 순서라는 개념 즉 그 누가 말한 '취득시효'라는 개념으로 존재적 기득권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가톨릭의 우선성을 놓고 대표격으로 생각한다고 하여도 존재의 정당성 시비는 그것에서 비롯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인정해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인식에 따른 존재의 당위성

앞서 한스 큉의 명제라고 하는 것과 그에 반해 나의 명제의 표현은 기술적 모순이 있는 것임을 먼저 언급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부여에서의 인식은 그 시비를 분명히해야 하며 이것은 가톨릭과 예수교 즉 신교의 존재의 정당성 비교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되어진 한스 큉의 '원칙적'이라는 표현이 그의 본래적 언어이든지 아니면 역주의 변역상의 언어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스 큉 그의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러한 보편적 당위성에서 원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은 가톨릭과 신교의 존재적 정당성 시비를 가리는 입장에서의 이 글을 쓰는 나의 중심이기도 하다.

가톨릭과 신교의 신의 명칭에 대하여서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각주5)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가톨릭의 입장은 범신론이나 범재신론적 입장일 뿐이다(각주6). 이것은 참된 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 하나님을 객관적 존재 근거지움이라는 개념 특히 신 존재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신을 규정하는 것을 증거의 사실로써 비로소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것,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삼위일체적개념도 그 바탕적 실제의 의식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실재의식'의 기본적 개념이 분명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은 존재의 여부(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비로소 받으시지 않으시는 자존의 전능하신 하나님 이심을 계시한 것이다.

삼위일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삼위라는 개념이 상대적 언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구별하여서 속성적 표현언어로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구별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그 속성적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이 인식의 계기의 작업에 비로소 종속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속성전달과 같은 잘못된 합리적 모습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성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존재증명할 수 있다는, 증거보다는, 증명이라는 개념에 길들여진 탓으로 하나님을 이성에 비로소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교적 입장에서는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순적 삼위의 합리적 기술의 부재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도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을 통하여서 말씀하실 수 있고 합당하게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삼신적 개념을 배제한 삼위로서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음을, 합리적 기술의 길들임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합당한 합리적 증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또는 임의적 수사로서의 '하나'에 '님'이라는 조사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합리적 사실을 증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존재를 증거하는 중심에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를 말하면서도 일체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 측면에서 합리적 모순이면서도, 실제적 의미에서는 합당한 합리적인 한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기술의 모순이라고하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시며 오히려 그 모순을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기뻐하심의 구별하심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히시는 오직 한 분이심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비교의 관건은 신인식에 따른 해석에 있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에 있어서 가톨릭은 '예수는 범신론적 또는 범재신론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입장이고 신교는 '예수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각주7)

예수님의 죽으셨다 살아나심이라고 함이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계시이심을 기억할 때에, 단지 하늘에 있는 신과의 위적 상관관계를 말할 수 있다는 가능태의 실재론에 입각해서는 예수의 실존과 그의 가르침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스 큉의 명제는 기술상 뿐만 아니라 원칙상 실제상으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God)의 명칭에 있어서도 단지 하늘에 있는 이라는 여자적(如字的) 개념으로서의 '하늘'에서 비롯되어진 '하느님'이라는 상대적 보편언어보다는 한 분이시라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신앙적으로 옳은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본래성의 기득권 인식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하느님이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셨다'(각주8)라고 하는 글을 쓴 것을 보았는데, '스스로'라는 수식어는 자존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로소 사용함의 부당함을 말할 수 있다.

'스스로'라는 개념은 본래성을 의식하고 표현하는 말인데,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가 아니면 스스로 한다는 그 '스스로'라는 개념의 본래성을 배제한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서 상식적인 측면에서 동의되어질 수도 있어도, 하나님의 증거적 차원에서는 기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본래성의 기득권 인식이 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나는 '예수교'를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특히 신교적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물론 자존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나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대의 추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참된 하나님을 향하는 그 중심은 이러한 중심을 향해 열려있다.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모든 기독교는 이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중심이 열려 있다는 것과 앞으로 그와 같은 신앙의 중심이 형성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각주9)

한스 큉의 명제 '예수는 가톨릭 신자인가?'라는 것은 기술상 그가 말하는 원칙상 그리고 실제적으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며, 그가 의도하고 인식하고 원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실제적으로 예수에 대한 인식과 고백도 상식수준일뿐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에 대하여서 기술적 모순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예수는 예수교 신자인가?'에 대한 나의 표현은 예수님이 신교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적인 증거의 표현임을 말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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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한스 큉, 가톨릭 교회, 배국원, 을유문화사 p. 31. pp. 31-33.


각주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은 어떤 것을 구별하여 하나의 개념화시키고 객관화시켜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측면에서의 성도의 모습의 일반적인 은총에 따른 개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실제의식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치우침이라는 개념의 언어도 온전히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사용함에 대한 정당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르게 구별되어지는가에 대한 주관적이면서도 합당한 판단을 믿음 안에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3) 물론 예수교라는 말이 우리나라의 표기적 입장을 따르고 있고 종교개혁의 역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어울릴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리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따른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예수교'라는 말을 쓰고 있다. 더욱 한스 큉의 가톨릭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증거라고 함을 의식할 때에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의 계시적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한 언어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각주4)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입장에서 기술가능한 표현을 비로소 받지 않으신다는 측면에서 예수님을 믿어 성도라는 이름을 얻는 자로서의 신자라는 개념으로 온전히 묘사되어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개념들의 비교라고 하는 것도 비교한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고 비교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너무 멀리 떨어진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과 예수의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메시아적 의식의 존재적 동연성을 시간적으로 잘못되게 이해하려는 현대주의적 신학개념에서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메시아라고 하는 개념을 시간의 판단하에 두는 즉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닌 가운데서 메시야로 생각하고 확신했다는 잘못된 개념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어왔다.(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역 엠마오 p. 13-115. 참고 : 게할더스 보스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에 대하여서 잘 소개 뿐만 아니라 잘 분별하여 답변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의 의식이라는 개념은 예수의 자기의식과 그것은 자신의 신앙과 자기 신뢰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존자로서의 합당한 신의식을 가지심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신자라는 말은 언급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진 언어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쓰여질 수 있는 말은 아닌 전문어에서 파생되어진 것으로써 일상적 상식보편으로는 사용되어질 수 없는 기술적 모순이 있고 쓰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각주5) 기독교와 세계, 이경숙 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p. 203.
가톨릭에서는 하늘에 있는 신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라는 뜻 표기를 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한분이라는 뜻에서 '하나'라는 수사에 '님'이라는 수사를 붙여서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신을 가르킨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 : 보통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본서 저자는 하나님으로 표기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전제하는 하늘의 신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


각주6)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은 신교에서도 고백하는 주기도문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절대자가 하늘이라는 한정적 범주에 있어서 한정되어지는 모습과 존재라는 개념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론적 개념을 글자 그대로만 생각하고 있고, 그로 인한 오류적 인식이다. 여자(如字)적 개념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있어야 한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도 자존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장소로서의 비유적 실제적 표현적 기술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늘이라는 객체에서 바로 하나님의 존재묘사적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 신교에서는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말할 때에 그런 범재신론적 개념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각주7) 범신론은 사물자체에 정령과 같은 신이 있다 또는 신성시되어서 인식되어진 모든 신들을 의미하고 범재신론은 만물들 속에 신이 충만이 있다는 그러한 개념으로 구별되어질 수도 있다. 위르겐 몰트만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문자적 해석의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서 있을 수 있는 잘못된 문자주의적 개념의 한 피해라고도 할 수 있다.

헬라어로 '엔 크리스토스εν Χριστος'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도 되지만, 문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 I believe in God 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해석이지만, 문자주의적 개념에서는 잘못되게 '나는 하나님 안에서 믿는다'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특히 너희 중에 라는 말은 Among이라는 말이 그와 같이 사이에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과 같은 측면도 지적할 수 있다. 즉 문자적 영감(inspiration) 즉 축자적 영감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 영감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가 있고 더 나아가서 그 '완전 영감(infallible inspiration)'이라는 것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서의 그 실존이 있게 된다.

즉 총체적인 신인식이 불가지론의 영역에서 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의 악함에 따라서 문자적 극단주의자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각주8) 월프레드 G. 헐리, 내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 정진석 가톨릭출판사.

저자는 본문 중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셨다'는 표현과 그러한 중심의 글을 싣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존재적 자존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스스로 했다는 개념은 그 존재적 정당함을 상식선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하거나 또는 찾을 수 없는 그냥 막연한 당위성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도 붓다를 '스스로 깨어난 자'라는 입장의 글을 본 기억이 있는데 행위적 묘사의 수단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지는 '스스로'의 개념은 실존적 자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정당한 묘사와 증거의 능력은 없게 되며 그것을 의도한다면 기만이라는 판단을 합당하게 받아야 한다.

모두 개념의 실존을 임의적으로 말하거나 또는 상식차원에서 인용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상식보편이라는 개념의 판단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특히 신의 증거라고 함에 있어서는 그러한 표현의 간교함과 기만은 죄악과 심판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각주9)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84-85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

“둘째 예언은 셈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명칭의 사용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서 벌써 셈에게 축복의 부여가 되는 것이다. 구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능력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이 특정한 족속의 종교적인 소유와 기쁨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깔려있다. 이는 셈족이 여호와를 경배하리라는 것 이상의 언약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어느 특정한 그룹의 하나님으로 불리운 최초의 것이다. 이는 그 족장이(이는 노아를 말함 역자주) 다음과 같은 송영을 말하게 될 정도의 경이적인 일이다. -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그분이 셈의 하나님이 (기꺼이) 되셨도다”이다.

중략

그리고 야벳이 셈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것을 셈과 야벳의 영적인 동거를 말하는 듯이 풍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제적인 정치적 정복이 의도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리적 정복이 야벳에게 종교적인 축복을 결과로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셈의 장막을 취함으로 거기서 구속과 계시의 하나님 되시는 셈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 일차적인 정치적인 정복에 있어서도, 그 결과적인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이 셈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정복은 참 종교가 세상에 편만케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델리취는 인상깊게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족속이다”라고 하였다.”

게할더스 보스 셈의 하나님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