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9월 02, 2005

석학 니체의 일기장에 대해

일기라는 것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있고 그의 철학과 같은 학문의 깊이를 나타낸 택스트를 말할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의 의미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

목요일, 8월 18, 2005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은 틀렸다..- 전 토미즘의 사상비판

에띠엔느 질송의 사상적 입장은 가톨릭에서 실재사상을 다루고자 했다는 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입장과 접근방식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일반적으로 토미즘에 있어서는 실재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띠엔느 질송이 토미즘에서 실재를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철학의 실존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출애굽기 3:1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각주1) 그것은 인용가능성만 생각하고 있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으로써 여전히 그 실재론을 실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질송의 그러한 기독교철학의 성립과 실재를 말함에 있어서 잘못되게 되어지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함을 철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저와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틸이 '하나님의 사유를 따라서 사유해야만 함을 함의 한다'(각주2)

그것은 게할더스 보스(G. Vos)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메시야적 사유'(각주3)라는 것의 의미를 말하며 또한 그것은 가능성의 여러 언어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실재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어적 인용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써 그 언급하고자 하는 것의 실재와 또한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질송의 기독교철학의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토미즘의 특히 신 토미즘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지만 토미즘은 이미 신론적 정당함에서 실재를 찾는 중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학대전 4권에서 읽을 수 있는 이방에 대한 변증에서는 '알미니안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질송의 사상으로 나타난다고 함과 일치'(각주4)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5월 02, 2005

SOPHIADEI

저의 웹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my main weblog and homepage



웹 블로그를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쓴 글들과 글을 쓴 사이트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인 미디어시대를 말하고 있는 블로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서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인 증거적 매체로 웹블로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블로그는 아니지만 저의 주 안에서 증거하는 중심의 글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심도 있게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진리라고 함을 저만이 가진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도들의 증거가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 따른 것으로써 상대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주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에 대하여서 증거하려고 합니다.


저의 글들에 대하여서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문, 신앙과 신학에 대한 글들을 링크시키는 것으로 한눈에 보실 수 있도록 계속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각종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카페와 클럽 그리고 외국에 있는 사이트들을 연결시켜서 블로그에서 일방적인 증거로 나타나는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 카페와 야후그룹 중심으로하고, 외국인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야후의 그룹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 가입하셔서 여러 가지 글로써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간단한 언급이나 개인적인 것은 이메일로써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은 소망이 있다고 하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각국의 언어로 교제를 나누며 또한 섬기고자 하는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종의 작은 증거가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적인 증거의 합당한 재가(裁可)가 있는 가운데서 마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이 쓰임이 있기를 기도하며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평안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notice..

1. 저에게 아래 이메일로 질문이나 기타의 말씀을 보내주시면 이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답변글을 블로그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블러그에 따라서 파란색 또는 때로는 보라색 제목들을 클릭하시면 구체적인 블로그 또는 사이트로 연결됩니다.
3. 링크되어지는 블로그에서 아카이브(Archives)를 클릭해주세요.. 날짜에 해당되어지는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글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아카이브(Archives)는 링크되는 블러그 우측 상단에 있습니다.
4. 본 블로그에 링크되어 있는 싸이월드 홈피 방명록도 가입없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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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소개합니다

이명신
강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계명대학교 자연대학 수학과 졸업
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소망교회(개척교회) 섬김

myoung shin lee
I am a preacher in Christianity
Keimyung University
Korea Theological seminary in south Korea

E-mail address

Main address : vosscare@yahoo.com
others: voswise@yahoo.co.kr, voswise@naver.com vosscare@gmail.com. etc.

설교 (preachings)

제가 섬기고 있는 소망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주간설교들을 원고준비되어진 것들을 중심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시고 comment 글도 준비합니다. 참고해주세요..

야후사이트 'gloriadei'의 글들을 중심으로 모아 두었습니다.

블로그글 (veritasdei)

야후사이트'veritasdei'에서 언급되어진 것들에 대하여서 정리하였습니다

신앙상담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나 질문에 대하여서 고민하였던 신앙에 대한 것들에 대하여서 나누었던 글들을 모았습니다.그리고 자유롭게 저의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이 블로그에 제가 답변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작은 메모장 홈피

저의 작은 메모장 홈피 입니다.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오시는 가운데 한번씩 봐주시고
또 자유로운 글들로 대화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야후그룹(외국사이트)

저의 모든 사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신앙과 신학사상에 대한 합리적 증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답변들과 신학사상 연구들과 그 증거들을 중심으로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며 보편교회와 보편교회의 현실적인 실제의 한 표현인 지역교회의 활성과 보편교회의 본질적인 성도의 교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기반으로 셈의 장막에 야벳이 거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이루기 위한 작은 노력입니다.

오직 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회원(membership)

블로그에 가입하신 회원님들과의 교제하는 블로그들을 연결합니다. 앞으로 한국과 그 외에 성도들의 각각의 교제를 위해서 각각의 블로그를 연결하겠습니다. 많이 봐주시고 참여해 주세요..

http://agapeia.blogspot.com/

두가지 권면

모든 회원님들을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두가지 권면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지역교회에 출석하기를 권합니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지역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등한히 하거나 또는 지역교회의 출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터넷은 지역교회를 위한 좀더 본질적으로 보편교회를 위한 것으로써 실존적 자리매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그러한 이분적 대치적 선함이라고 하는 것의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는 가운데서 교회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고 인터넷으로만 신앙생활하겠다는 생각과 유익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의 기본적인 것은 이러한 교제라는 것이 간접교제이고 인격적인 측면에서도 간접적인 것으로써 직접적인 인격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고 그것을 모방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적 증거의 합당함을 믿는 자로서 행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성전이라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개념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한 것에 마음두지 않도록 함이 좋고 믿음으로 근처에 있는 지역교회를 분별해서 선택하고 출석하는 신앙생활을 하심이 옳다고 함을 말씀드립니다.


둘째로는 비록 간접적이지만 설교원고나 또는 우리의 글들을 통해
좋은 교제가 더욱 많아졌으면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서 도망하다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리에서 곤고할 때에 한 제사장에게 가서 진설된 떡을 먹고 기운을 차렸던 것과 같이 지칠 수 있고 곤고한 가운데서 저희 교회에서 증거한 설교말씀도 보시고 은혜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잘 차려진 진설된 아름다운 영적 식탁은 되지 못하지만 요기할 수 있는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은혜가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윗과 같이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타사이트소개

저의 공식홈페이지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야후 블러그)품꾼의 하루
한국의 야후 불러거들과의 교제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야후 블로거들과의 교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의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사이트와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고려할 수 있는 그러한 사이트들을 접속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본 블로그에서 '개인적인 선호 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서는 저의 개인적인 추천하고자 하는 것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블로그에서의 대화
블로그스팟에 가입하신 성도님들과의 대화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지역에 메이지 않고 모든 성도들이 오프라인에서의 교제를 위한 온라인 교제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교제할 수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 작은 사과씨앗을 심는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


영어권 야후 그룹(설교)
Only sermon

한국어로 설교한 것을 올리도록하고 이것은 시간이 되어지면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거나 직접 설교문을 작성하여서 각 회원들에게 주의 말씀 안에서 교제를 시도할 목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야후클럽)신앙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한국에서 야후멜을 쓰시는 분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위해 준비한 클럽입니다. 글을 기록하고 참고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Review favorite sites


여기에서는 제가 추천하고 싶은 사이트이나 제가 참고하는 사이트를 링크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추천이나 또는 소개받은 사이트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사이트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또는 홈피에 글을 남겨주시면 참고한 후에 수록하도록 하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수록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한국에서 블러그와 달리 토론할 수 있는 까페입니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앞으로 가장 많이 활성화 되어질 까페입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며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네이버를 사용하시는 분들은 이용해주세요..

야후 블로그 설교

한국의 야후 블러거들과의 만남과 증거를 시도함에 있어서 직접적인 신앙인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야후 블러그를 사용하는 성도님들과의 교제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알림방입니다.





소망교회 종무예배를 드립니다.


2011년4월27일 7시30분 수요예배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관심가져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