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26, 2006

공회(Catholic)와 다르마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신인식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인식의 확실성을 의문시하는 것에 동의할 수도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것의 한 모델이라고 하는 것이 작금의 구교인 가톨릭불교연합적인 상호 인정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경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모임에서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음악회나 같은 입장에서 활동하는 구제의 모습들 또는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존재의 탄생일에 서로 격려하는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되어지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한 회의주의적인 신인식의 확실성과 그에 따른 보편적 사고의 추구라고 하는 것이 동 서양의 인식의 공통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에 고백되어지고 있는 '공회'(Catholic)과 다르마(각주1)라고 하는 것이 표현의 용어적 차용적 기원은 다르다고 하여도 같은 보편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탈 해체적 입장에서 또는 탈 실존적 입장에서 초월적 보편이라는 개념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서의 보편성을 서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적으로 표현해서 잘못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동`서양의 차이라는 점에서 그 다름에서 비롯되어지는 동일시에 대한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읽어서 공회를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거룩한 성도들의 공회 보편적 교회 라고 하는 것은 주의 택하신 백성들로서의 주의 절대적 보편적 재가가 있다는 것으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의적 보편적 아주 큰 전체를 말하는 보편이 결코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써의 실존적 속성인 '절대 보편'이라는 것과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임의적 보편으로써의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서는 이런 연합으로서 또는 그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부여함을 나타내거나 제스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서로의 기만이 되어질 것이다. 이것은 구교의 실재론적 입장이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와 보편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의 행보임에 있어서는 그 신앙적 입장의 실존적 합당함은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서 실존적 자리매김이 되고 만다고 하겠다.

이러한 구원을 본래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자들과의 구주나심에 대한 동일한 행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가히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바르다고 말하기는 너무나 요원한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은 성경말씀을 의지하기 보다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경향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숭상적 개념에서 이러한 개념들의 임의적 사용과 그에 따른 잘못을 취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참고설교 '온세상 구주'




각주1)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이영주 중앙 M&B p. 74.
불교는 그 후 마우리아조가 보호했다. 인도 전역을 정복한 마우리아조는 다르마(보편적진리·불법)에 의한 통치를 목표로 삼고 불교를 퍼트렸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이영주 중앙 M&B p. 75
기원전 3세기에 불교교단은 화폐로 하는 보시의 시비를 둘러싼 논쟁으로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 불교로 나뉘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소승불교) 실론섬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져(남방불교)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서북인도로 전해진 불교는 그리스·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여 다신교가 되어 보살에 의한 중생의 구제를 교의에 포함시킨 대승불교가 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과 한국, 일본으로 전해졌다(북방불교).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이영주 중앙 M&B p. 76
인도에 대제국이 건설되는 계기가 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서인도 침임이었다. 침입에 대비하여 대군을 조직한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가 철수한 후의 혼란을 틈타 기원전 317년경에 마우리아왕조를 세워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 유역을 지배했다. 제 3대 아소카왕은 남인도의 드라비다 세계를 정복해 남단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비참한 전쟁을 경험한 아소카는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에 의거한 정치를 지향하여 전국에 마애비와 돌기둥을 세워 나라에 불교정신을 전파하고 경전을 정리했다. 아소카왕은 다양한 문화와 민족으로 된 인도 세계를 불교라는 이데올로기로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글쓴이의 부언 : 어떤 사실에 대한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외에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로소 취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깨달은 자로서의 숭상을 받는 석가모니도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은 대중적 구제라는 대승불교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본래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페르시아적 개념의 영향으로서 모습을 마음에 두어야 하며 또한 구제라고 하는 교의도 임의적인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즉, 파생적 당위성으로써 구제라는 개념은 본래적인 인생의 구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내용의 각주를 달게 되는 것은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단정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할 때에 전반적인 사고의 재고가 보다 더 강한 표현이 되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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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1월 30, 2006

도올 김용옥 선생의 종교비판에 대한 답변

서론에 가늠하며

먼저 박학다식하신 분의 글(각주1)에 대한 평가의 글을 쓰게 됨에 있어서 몇가지 양해(각주2)를 구하면서 글을 쓰도록 하겠다.

전반적인 글의 흐름과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의 솔직한 배경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독자들의 심정에 다가갈 수 있는 노력과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주 전문성을 갖춘 것을 최대한 활용한 가운데서의 언급을 말하고 있고 초지일관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고 또한 그 기술이론의 대중화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는 것과 같은 표현으로 사유의 제고찰을 요구하는 정적인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글은 합리성의 선명함이라고 하는 것은 있지만 정당성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파생적 입장에서의 합리성을 재구성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즉 그의 글에는 합리성과 타당성내지 정당성에 대한 파생성과 본래성에 대한 시비없이 간단한 논지로 인용적 입장의 당위성만 따르고 있다.

한마디로 정당한 논리인지, 논리적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재고없이 논리적이면 타당성에 대한 개연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임의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즉 정당하게 논리를 펴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위 말만 되면 정당하다고 우길 수 있는지에 대한 재고없이 논리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말만 만드는 사람이라는 판단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개인적인 유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의 타당성 시비를 위한 논쟁에서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제적 입장에 충실할뿐 저자 본인의 그러한 수행적 정당함을 보이지 않고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글에 대하여서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수행적 모순이 있다고 하여도 파생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 길들여질 수도 있는 이성들을 위해서 그러한 생을 위한 철학은 '니체도 구현하고 싶어했던'(각주3) 가치있는 일은 철학적으로도 논의의 당위성을 말할 여지가 있다.

물론 철학적 입장에서 답변한다기 보다는 신앙인으로서 신학적 입장에서 답변하는 것이다. 논점은 신학적 입장의 기술이 저자의 반론과는 다르게 정당하다는 것을 말함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서 합리성의 전개를 통한 비판적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각주4)

본론에 즈음해서

1. 저자의 합리성의 전개에 대하여서

저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그 논리적 실존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재고가 없다. 즉 합리성과 타당성이라고 하는 것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합리성과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합리성을 진행시키고 있다.

상식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항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개연적 표현에 대하여서도 열려있어야 하는데 단편적으로 합리성에 대한 언급을 주저없이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의 말의 실제성을 불어넣고 있다고 보여질 수 있는 러셀의 기술이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소위 말하는 아펠의 수행적 모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논의의 범주가 달리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재고없는 비이성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주5)

즉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의 근거로 주장하는 러셀의 기술이론'(각주7)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인식의 신인식불가능성에 대한 입장일 수 있지만 신의 사역적표현이나,신의 인식적 제한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식의 외연에 있다고 한다는 것만으로 합리적 증명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비판적 합리성까지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각주6)

그리고 버트란트 러셀에 대한 이해에서도 볼 때에 무리한 이성적 행보를 시도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이성적으로도 치우친 폭력을 일삼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겠다.

'버틀란트 러셀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이다.'(각주8) 그렇다고 할 때에 무신론적인 입장을 말하기 위해서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을 도입한다는 자체도 엉성하며 전혀 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저자가 지적한 러셀의 희열이라고 하는 것은 무신론자로서의 자기 합리성의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으로써 그의 사상의 입장인 불가지론에서 무신론으로써의 전환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자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의 대변인처럼 인용하고 있고 그의 권위를 빌려온다는 것은 저자의 이중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말함은 '철학자의 권위에 대하여서 그렇게 의식하지 않도록하고'(각주9) 그러한 부적절한 러셀의 권위를 인용함을 통하여서 무리한 당위성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그 확신을 과신의 자리까지 이끌어가면서 확실성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데(각주10) 버트란트 러셀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철학적 입장에서는 어떤 중요한 것을 했을 수 있다는 개연성뿐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각주11) 이러한 것은 러셀의 기술이론에 대한 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대한 문을 열어놓고 있다 즉 그것으로 신인식의 부당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는 여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2. 저자의 언급한 내용들 중에서 몇가지

이처럼 부당한 인용과 교조주의적 권위에서 합리성의 바른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한 말들 중에서 몇가지 단정적인 입장에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1)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종교적 신앙의 강요는 있을 수 없다. 철학은 무전제의 사유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종교교육을 받으면 안된다.

답변 : 강요라고 하는 것은 합당치 못한 것을 인식하게 함이나 어떤 윤리적 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기만적으로 폭력적으로 납득 입장을 요구하게 되는 것을 전제로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핑계할 수 없는 사실성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은 강요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리성 자체에서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자도 인정하는 바라고 할 때에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한 당연한 권면을 저자가 강요라고 당위성이 결여된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반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인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전제라고 하는 것도 그 무전제라고 하는 말이 전제되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기술이론적 소거의 당위성을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당위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반박일뿐이기 때문이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적 정당함으로 그러한 모순있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면 그 합당함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위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굳어진 의견으로서의 도그마에서 함부로 규정하여 말하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나 역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모태신앙”운운하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갔지마는 결코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신학대학을 나왔다. 이것은 노라가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종교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종교가 인간세에서 구태여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근원적인 선포였으며 해탈이었다.

답변 : 이런 말은 아주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동정을 구하는 동정의 당위성이 결핍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의 기술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공론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기초석을 비로소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자신이 말에 대한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실재론이 존재할 때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반박가능성의 부재라는 개념이 올바른 것이라는 임의적 생각에 과신한 나머지 중심을 잃었던가 아니면 아주 청중의 정적인 당위성에 갈망했던가 둘 중에 하나일 수 있음을 읽을 수 있다.

3) 내가 이런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뜻은 종교는 도그마(dogma,독단)의 체계라는 것을 청소년에게 일깨우기 위함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믿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며, 특정한 교회에 나의 삶을 복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도그마에 나의 삶을 복속시키고 나의 사유를 제한시키며, 불가침의 절대적 명제를 삶의 목적론적 전제로 삼는다면 그 인간의 삶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답변 : 도그마(dogma)라는 말은 '도케인' 본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진다. 어쩌면 하나의 의견이 규정되어지고 굳어진 것이라는 점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당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면 단지 정형화되었다는 것만으로 인식의 자유가 없는 것과 같이 매도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의 발상이라고 하겠다. 도그마는 앵무새처럼 의미없이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양심으로 동일하게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통일성이 있는 규정적인 표현이 되어지는 자유로운 고백이다. 자유의 실제의식없이 정형화되어진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정황적으로 다친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저자의 아마도 '인식의 거식증'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3) 출 3:14절 해석

저자는 버틀란트 러셀을 이해함에 잘못을 범한 가운데서 그의 기술이론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문법의 오류라는 것을 지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각주12) 러셀은 합리적 반박가능의 부재라는 개념에서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입장(각주11참고)인데 저자는 그러한 것에 대한 개념없이 비로소 파생적 정당함을 러셀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잘못 적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인식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 전에는 납득되어서는 안된다는 데카르트적인 회의적 정신'(각주13)에서 잘못 나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반박부재의 합리적 입장이 러셀의 기술이론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름과 고유명사의 문제를 살펴보자! 얼핏 보기에, 이름과 고유명사가 일치하는 것 같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시하는 단순한 기호일 뿐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184.)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는 본인은 그러한 신존재증명에서 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인식의 확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 실제와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재고없이 행해지고 있는 잘못된 중세의 신학적 입장에 맹목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서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존재증명을 할 수 없다는 증명 역시 증명의 카테고리에서 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증명에서 비롯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보다 더확실한 증거에 의한 실존적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 증명이라는 것과 다른 범주의 그것을 증명으로 반박부재를 말하겠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각주14)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파생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하는 것에 길들여진 이성은 지혜롭지 못하게 증거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언어학적으로 본다고 해도, '기호'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같이 양립되어지는 것으로써 반드시 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5)

구태여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문구를 기호로 이해한다면 기의적인 실존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러셀이 기술이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술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어떠한 '묘사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는 실존적 개념이 동반된다는 것이 언어적 분석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이다.(각주16)

이러한 언어이해에 대한 부족에 따른 러셀의 입장을 잘못 신뢰하는 가운데서 저자가 실수하는 것을 본다. 즉 증명에 길들여진 이성이라고 하는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 자신도 그러한 파라독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서 틀린 상이한 동일범주의 판단을 받아야 함이 기정사실화 된다.

이러한 증명에 따른 신존재증명의 여부를 벗어나서, 그것보다도 확실한 증거적 실제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이름 그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은 그 해석할 수 있는 다양성'(각주17) 속에서 납득의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는 방법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자존자의 하나님으로 주목할 때에 그 해석적 정당함을 또한 스스로 취한다는 측면에서 납득 정당함을 읽게 하는 가운데 성경의 증거의 사실로서 받게 되는 것이다.

4) 성경의 보편성이해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납득 합당함을 핑계치 못하게 되는 가운데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성경의 실존에 대한 보편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 종교라는 것과 일반 텍스트라는 것으로 볼 때에 한정되어지고 좀더 보편적인 모든 종교적 입장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협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며 가르치는 내용도 그러한 가운데서 동일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합리적 당위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주권적으로 절대 합당하게 선택하여서 그러한 편협한 형식속에도 자신의 절대 보편적 재가를 허락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속성적 계시로써 자증(Autopistia)하게 되는 것이며, 증명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가운데서 모순되어보이는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의 실제를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며 그에 따른 절대 무오의 성경과 완전영감에 대한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실제의 진리와 사실로서 합당하게 증거되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절대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재가적 보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비교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으로써 자기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경전이나 그것에 비롯된 종교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속에서 기만성의 정체성으로써 부정되어짐의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는 것이다.

즉, 타 모든 종교와 그에 따른 경전 자체의 정체성을 위한 합리성은 본래성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대적 파생적 당위성에 입각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한 변명의 합리성은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적 재가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는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의 기만성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음으로 합당하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성경해석의 실존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존의 절대자가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택하신 종들의 눈을 여신다는 것은 소망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간과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다음 세대에게 실제의 개념을 임의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글쓰기를 지도한다는 것과 꼭 하나님에 대한 합당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다음 세대가 실재가 없는 알맹이 없는 임의적 말을 꾸며내는 기술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점에서 재고되어질 수 있는 윤리적 당위성이 글을 쓰게 했다.

물론 신앙적인 것이 기본적인 것이지만 신앙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뜻하심을 중세와는 다르게 합당하게 베풀어나가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적인 입장임을 기억할 때에, 다음 세대들에게 이성이 건전하지 못한 이성들의 시끄러움과 비이성적 간음의 소리에 혼돈이 있을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간교한 플류우트 소리를 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

학문의 숲속을 돌아다니며 소리지르는 신 '판'의 소리는 문명화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상적인 인식속에서 자연스러운 합당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과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한 모습이라고 할 때에 합당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가운데서 다음세대들의 참으로 알차고 합당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학문의 숲을 소요하는 패닉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세미한 음성으로서의 아주 평범해보이는 주 예수님 말씀하심의 소리를 듣을 수 있도록, 위해서 축복하며 글을 맺는다. 그가 설령 일시적인 숲속의 판이었을지라도 동일하게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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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70-191.) -3. 종교적 신앙은 사유의 단절 - 를 읽고

각주2) 아직 생존해계시고 또 학식과 연배에 있어서 존경을 표함이 마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술상 존칭은 생략함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술상 저자는 김용옥선생을 지칭하고 본인은 글쓴이를 지칭하기로 한다

각주3)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 105.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생철학은 그의 의지적 표현일뿐 그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래도 유용한 것으로써의 부정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한마디로 '그래도'라는 방향전환을 위한 모색적 입장이 가능한 가운데서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개연을 의미할 뿐이다.

다만 여기서 인용하는 것은 니체와 같이 사상사에 3대 악동에 대한 발판에서 너무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파생적 합리성에 대한 저자의 의지적 표명이 객관성을 잃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의의 가치적 입장을 힘써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철학자 니체의 입장에서 논의를 위한 동의를 할 뿐이라는 점에서 말을 꺼낸 것이다.

각주4) 이것은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의 기본적인 전제 즉 '3. 종교적 신앙은 사유의 단절'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서 그의 쓰는 언어와 인용의 부당함에 대한 사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본 글의 진행방식을 이룬다.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과 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의 비교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전자적 입장에서 신학적 불가해성을 비로소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물론 뒤에 언급될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에서 그 전제적 소거라는 것으로 모순적 입장을 피해가겠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것은 신적인 재가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적 입장에서는 범주가 달리 나타나는데 상대적인 범주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논리적 정당함을 비로소 주장할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각주5) 논의를 위한 입장에서 신에 대한 계시를 말할 때에는 그 특수성인 신의 계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정도는 인정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것의 전제에도 불구하고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논의의 기본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 특수성으로써의 신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 신의 보편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때에 일반 상대적인 범주와 다른 범주의 생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것없이 동일범주로서 객관성을 말한다면 이것은 객관성에 대한 기만적 모습을 취하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모독이 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저자에게 신의 보편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전제로서 의견을 개진하고 일상적인 범주적 당위성에 대한 동의가 있고 난 다음에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동의할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형식적으로 그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 이성의 기본이 될 수 있다.

각주6)이것은 러셀도 그의 저서 '철학의 문제들'에서 의식하게 되어진 것이고 이러한 것은 앞서 칸트의 이성안의 종교라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다 중세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실제적 입장의 비판할 수 없는 입장에서 칸트의 그 책을 금서목록으로만 제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에서는 그 신론적 입장의 재고찰에 따른 새로운 인식으로써의 불가해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 불가해성과는 달리 재가되어진 사실의 실재성과 실제성에 따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각주7)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82-185.
럿셀의 기술이론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는 명제에 관하여, 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는다면, 의당 우리는 “그것은 그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 우리는 마치 “그 황금산”에게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며, 그 존재하는 황금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은 신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므로, 신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무신론적인 주장을 해도 그것은 유신론적 전제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황금산”(The golden mountain)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지점에 순전히 황금으로만 되어 있는 어떤 산에 대한 이름(name)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서울의남산과 같은 산을 직접보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남산”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지칭과는 관련없는 논리적 구성물이며, 그것은 한정적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이 한정적 기술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특정한 대상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중략) 다시 말해서 한정기술이란 그 기술의 외연(denotation)이라고 말할수 있는 어떤 대상을 명제의 구성요소로서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기술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불완전한 심볼(incomplete symbol)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다름에 이름과 고유명사의 문제를 살펴보자! 얼핏 보기에, 이름과 고유명사가 일치하는 것 같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시하는 단순한 기호일 뿐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민우”(民雨)는 현재 내가 매주 목요일에 만나는 중앙고 2학년 학생이며, 그 학생을 직접감각소여(sense data)를 통하여 알고 있으며, 그러한 직접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실존하는 대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로서 통용되는 어떤 발성체계이다. 그것이 “백성비”(民雨)라든가 하는 이름 지체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의미가 없는 순수한 지시심볼인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이름의 경우에는 존재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따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 민우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무의미한 명제이다. 민우는 민우일 뿐이다. 존재의 여부를 따질 이유가 없다.

직접지식과 기술지식

만약 “민우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의미있게 하려면 주부에 해당되는 말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EBS 도올선생 철학강의를 듣는 중앙고 2학년 학생중에서 안경을 쓰고 얼굴이 통통한 그 학생은 존재한다”라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EBS,”“도올선생 철학강의,” “듣다.” “중앙고 2학년,” “학생,”“안경,”“쓰다”“얼굴,”“통통하다” 등등의 기술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우리의 직접적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그 속성을 보유한 대상의 존재여부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직접적 지식에 대한 사실적 검증으로 판결ㄷ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결까지도 갈 필요가 없다. 한정기술은 논리적 구성일 뿐이며, 그 논리적 구성을 잘 분석하면 한정기술 자체가 사라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준재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발생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열렬한 사회운동가였던 버트란트 러셀경(Bertrand Russell, 1872~1970)의 기술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s)이다.

각주8) 버트란트 러셀, 종교는 필요한가 (why I am not a Christian) 범우사 p.219 부록1. 하느님의 존재 -러셀과 코플스톤 신부와의 토론-

여기서 버트란트 러셀은 분명하게 자신이 불가지론자임에 대한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증명의 한계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나는 기표의 문제는 기의를 달리한다는 기호적 입장에서 하나님이란 표현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해두는 것으로 생략한다)

각주9)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69-170.
".. 그들의 언어는 연구의 대상으로 제단 위에 모셔있을지언정, 내가 일상적으로 밥상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가 학문을 지배하면서 학문을 교조화시키고 초월화시키고 우리의 삶에서 유리시켰다. 철학사에 나오는 어떠한 인물을 접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를 같은 반에 있는 훌륭한 친구 이상으로 그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의 비범한 발상을 이해하고 나도 비범하게 되면 그뿐인 것이다. 내가 예수가 될 수 있고, 내가 콩쯔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면 안된다."

본인이 볼 때에 저자는 러셀에 대한 부당한 인용적 입장에서 그의 권위를 입어서 결론을 내리고 있고 그 러셀의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성 시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냥 간과하면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맹목적인 권위주의적 발상의 교조적 입장을 저자 자신도 못버리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즐거워하기 원하는 자위는 저자 스스로의 두 개의 인격적인 판단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겠다.

각주10)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90-191.
'20세기의 분석철학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처절하게 존재론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러한 논쟁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외경의 염보다는 연민의 정이 앞선다. 우리에게는 신에 대한 이름도 없고 존재도 없고 실체도 없으며, 따라서 만물도 오온의 가합일 뿐 존재의 영역에서 그렇게 피튀기게 싸울 필요가 없다. 러셀의 기술이론을 생각하면, 서양문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종교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아직 정당성의 시비를 위한 범주적 개념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러셀의 기술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불확실성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한 표현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결론을 이끌고 있는 것은 러셀은 전반적인 입장에서 그의 논문발표에 있어서도 그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바꾸는 측면까지의 자기 논문에 대한 확신은 이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무신론의 대부로써의 결정적인 표현의 사실을 비로소 말한 것과 같이 기만적으로 그의 사상을 인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인용과 결론과 이해의 결핍을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각주1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 철학논고, 이영철 천지, pp. 9-30. 버틀란트 러셀의 서문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씨의 (논리,철학논고)는 그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를 주는 것으로 증명되든 않든 그 폭과 범위와 심원성에서 확실히 철학계의 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질만 하다. (중략) .. 이러한 가설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반론들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씨의 결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보다 쉬운 가설이 있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비록 이 매우 어려운 가설이 지지 가능한 것으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씨의 이론 중 매우 많은 부분은 -그 자신이 가장 강조하고 싶어하는 부분은 혹시 아닐지 몰라도-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논리학의 난점들 및 반박 불가능해 보이는 이론들의 기만성을 오랫동안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어떤 이론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근거만으로 그 이론의 올바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도 명백하게 잘못되어 있지 않은 어떤 논리 이론을 구성해 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중요한 작업을 성취해 낸 것이다. 내 의견으로는, 이러한 장점이 비트겐슈타인씨의 책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을 진지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 1922년 5월 버트란트 러셀-

본 책의 역자 이영철씨는 1951년 4월29일 죽은, 금세기의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고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한 자에게 정작 버트란트 러셀은 반박불가능이라는 합리성 자체에서 올바름이라는 정당성이 비로소 나온다는 것에 대하여서 회의적인 가운데서 상식적인 측면의 정당함에서만 중요성의 현실적 인식의 재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러셀의 솔직한 모습이 개인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러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러셀의 기술이론의 소개에서 상대적 반박불가능에 대한 인식에서 올바른 것이 비로소 있는 것과 같이 이성적 당위성을 부풀리고 있는 저자 김용옥 선생은 러셀에 대하여서 이해도 결핍되어지고 단지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부당하게 인용하여서 과신하고 있다.. 저자 자기 이성의 기만성으로 보여질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각주12)
(중략)..이러한 기술이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적 미신에 쩔어있는 서구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러셀의 고육지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신은 존재한다”라는 말 자체가 엉터리 문법(syntax)에서 발생한 엉터리 명제라는 것이다. 우선 신은 민우나 도올과 같은 이름(name)일 수가 없다. 아무도 저기 저 우뚝 서있는 남산을 쳐다보고 지칭하듯이 신

을 이름으로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호렙산 떨기 나무 불꽃에서 신을 만났다고 하는 모세에게도 신은 자기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모세가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터인데 그러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도 신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나인 자이다”
“I am who I am”(RSV)
“I am that I am”(King James)

결국 신도 “나는 나일 뿐이다”라는 식의 토톨로지(tautology,항진명제)로서 대답했을 뿐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적이고도 신화적인 한 장면의 언어적 묘사에 불과한 것이지만, 신은 근원적으로 존재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재를 말하려면 신은 반드시 기술되어야 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구문론적 오류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낸 그 무엇, ” “전지전능한 그 무엇,” “시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인격적인 그 무엇,” “사랑의 화신인 지고의 그 무엇”등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그것이 일단 기술되면 그 기술구는 정확한 구문론적 분석에 의하여 소거될수 있으므로 그 기술의 대상인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사라지게 죌 것이다. 존재는 근원적으로 속성의 문제일 수가 없다. “신은 완전하다.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는 식의 유명한 안젤므스(Anselmus, 1033~1109)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ontologischer ßeweis)이 오늘까지도 당연한 통설처럼 받아지고 있는 서구전통 속에서는 러셀의 반기는 매우 혁명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른다. “신은 완전하다”는 삼단논법의 대전제 자체가 전혀 무의미한 말장난의 나열일 뿐이다. 더군다나 완전성 속에 존재성이 포함된다고 하는 존리 자체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존재성이 어떤 사물의 속성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것은 노랗고 빨갛고 하는 따위의 속성적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존재한다. 도올은 사람이다. 고로 도올은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으로써 도올의 존재성을 입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주13)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I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pp. 420-421.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은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어느 것이든지 진리라고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았으면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 둘째 연구과정에서 만나게 된 어려움은 분석하고 나눔으로써 여러 각도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할 것 셋째, 자신의 사상은 가장 간략한 것부터 가장 복잡한 순서로 질서있게 배열할 것, 넷째, 모든 것을 낱낱이 열거함으로써 빠진 것이 없도록 할 것, 그렇지만 이상 언급한 4가지 요점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수학적 지식보다는 더 확실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수학적 지식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경험적 관찰에서 유래되지 않고 이성의 본질 그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수학적 지식은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이 없이도 진리일 수 있다. 반면에 경험적 지식은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

이성적 증명되기전에는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것이라는 말은 그 납득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의 파생적 정당함에 비로소 두려고 한 것으로 중세에 이성적 종교의 잘못된 모습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볼 때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합리성 외에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정당성에 따른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구교적 또는 중세적 교회의 철학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박이 결국은 동일한 합리성이라는 자체적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의 회의적 이성이라고 하는 판단을 받게 된다고 하겠다. 물론 동일하게 같이 부정된 범주에 있는 부정되어진 다양성속에 한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14) 증명증거라고 하는 것은 그 실존적 범주가 다르다 물론 상관관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며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외연에서 실존을 말할 필요와 가치까지 없다는 가운데서 증거라는 개념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 증거의 범위가 이성이 외연이라고 하는 판단 범위에만 국한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외연의 연장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경계가 있는 다른 영역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외연이 증거의 모든 영역과 범주를 비로소 주장하는 것과 같이 기만하여서 실재를 말할 수 없고 다만 의미없는 실제없는 비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편협된 범주이해에 따른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것은 증명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 개념과 범주안에서 존재하게 되는 실재로서의 실제적 사실제시로써 증명보다는 하나님의 실제적 자기계시를 더 온전히 나타내게 된다고 하겠다. 범주적으로 볼 때, 증거는 증명을 주장할 수 있지만 증명은 증거를 비로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확실성을 증명에 따른 납득이라는 개념의 파생적 정당함을 데카르트와 같이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진 이성은 자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즉 저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판단하에 있다고 하겠다.

각주15) 코블리, 기호학, 리챠잔츠그림/조성택, 변진경 옮김 김성도 감수, 김영사. p14;15;17.
"소쉬르는 언어 기호가 양면적인 실체 즉 이원적 구조를 갖는다고 정의했다. 기호의 한면을 기표(signifier)라고 하는데, 기표는 기호에서 전적으로 물리적인 측면이다. (중략) 소쉬르에게 있어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signified)로 구성되어 있다. 기의는 한 기호안에 기표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또한 기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의는 정신적 개념이다.(중략)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으로 결합한다고 역설했다. 이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은 소쉬르의 언어 기호론에서 핵심을 이룬다"

이후에 기호학의 발전에서 인식하는 자의 입장까지 고려되어지는 것으로 발전되어진다 이런 가운데서 인식자의 인식부재나 또는 인식할 수 없음에 대한 것 또는 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 또는 여럿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부재라는 그 자체까지도 인식의 특별한 형태로 볼 때에는 그 확실성의 정도에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게 된다고 하여도 기의는 분명이 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기호를 이야기 하면서 그 기의로서 존재하게 되어지는 실존에 대한 것은 부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모습은 기호에 대한 임의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호라는 것에 실존의 부재를 말하는 유명론적인 이해로 해석하기를 마음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유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의 부재로 비로소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만은 없다는 것은 저자가 알아야 할 것이다.

각주16) 형용적 규정 즉 빨갛다 노랗다 이러한 것은 어떠하다는 동사적 개념과 상관성을 가지게 된다.즉 규정이라는 개념이 동일한 범주적 사실을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언어로는 규정과 존재가 나뉘어지고 있다. 즉 '이다'와 '있다'는 동일하게 표현되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의 인식을 표현하는 언어는 다르다. 즉 영어의 be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 그리고 히브리어에서의 '하야'동사는 모두 '이다'와 '있다'라는 말이 같이 언급되어진다. 즉 규정과 존재의 동일범주적 입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야동사가 쓰인 '스스로 있다'라는 개념은 그냥 나는 나인 자이다” “I am who I am”(RSV) “I am that I am”(King James)라고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하게 되는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권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하시는 것이다.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은 러셀에 대한 이해에 부족과 함께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서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17)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화요일, 10월 24, 2006

이성의 농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의 글을 보면서 참 어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이 사실인지에 대한 개념없이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어떤 임의적 요령으로 정신을 분석한다고 합니다.

조금 많이 알려진 작가로서는 '에리히 프롬'이 그런 저서를 내놓고 있고 상당히 오래동안 농담해온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어떤 감리교측 사람도 기독교와 정신분석이라는 책을 써놓고 있더군요.. 그리고 제법 사람들의 손 때가 묻은 것을 보니.. 애독자들이 많았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참 임의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개념으로 객관성을 말하면서 그 주관의 시간인식에 따른 무의식 세계에 대한 합리성에서 정신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것.. 아주 학문적으로는 새로워보이지만 개연적 합리성의 조미료는 인식적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다머의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 비토리오 회슬레의 저서 중에서도 객관적 근거지움을 말하고 있는데 대륙의 합리론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론에 대한 회의적 개념에서 문학적 이성을 실재보다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해한다고 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을 분석한다.. 가히 안티들의 인식의 자극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사실이지만 안티들의 불쌍한 인식적 자아의 인식손상과 굴절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기 도그마적 병폐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될 것이니.. 참으로 정신있는 말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사도 바울의 목소리(행 26:25)의 의미가 무엇인지 증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무엇이 실재인가에 대한 절대적 인증적 개념도 없이 개연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개념만으로 사실 분석과 그에 따른 기독교의 정신을 분석한다.. 자존자도 알지 못하면서 자존자의 정당함을 부여받은 성도들의 인식을 분석한다.. 과연 상식적으로도 정신이 옳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발 물러나서 그들도 여전히 이런 농담을 즐기는 가운데 자해하고 있는것에 대하여서 연민을 느끼면서 핑계치 못하는 복음을 받기를 소원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한마디로

임의적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것의 차원에서 존재증명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기만적 확실성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존적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증명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를 의지하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근거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객관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말한다고 노력함에 있어서 헤겔이 말하는 철학의 개조나 아펠이 철학의 변형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도 보편의 상식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당연성은 이미 전제되어질 수 없는 것으로 헛된 합리성의 표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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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15, 2006

헤겔(hegel)의 실제의식에 대하여서

헤겔에 대하여서 판단함에 시대적으로 관점에 따라서 달리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도 있는데,(각주1) 헤겔에 대한 판단도 시대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강요되면서 그의 신학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도 합당한 재고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더만은 역시 헤겔의 정신의 실체라고 하는 것이 주입되어진 사유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표현하고 있고 또한 포이엘바하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구교의 실재론이 부재되어진 가운데서 소위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그러한 존재의 유입과 정체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당시 튜빙겐 신학의 정체성이 어떠한 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구교의 영향과 같은 그러한 점에서의 그러한 실재론을 벗어나지 못한 개신교 정통주의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급기야 헤겔은 그의 전체 사상의 서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강요'에서 '현실은 이성적이고 이성은 현실적인 것'(각주2)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이성적이고 이성은 현실적인 것' 이러한 표현은 현실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비로소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겔철학이라고 함이 그 신학적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고 할 때에, - 물론 칸트의 입장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른 신학적 가르침을 위해서 재고할 만한 또 재고해야할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현실적인 실제라고 하는 것신앙적 실제라고 하는 것상관성있게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오히려 부정하는 것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게 인식함에 따른 신학적 재고와 사실 규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가지 지적한다면, 그의 주저 중에 하나가 '정신의 현상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에 대한 섭리를 자연신관으로 해석하여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르게 재고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자연신학이라고 하는 것도 그 자연신학에서 그 실재라는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칸트를 비롯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연신관으로 말하고자 하는 현상적 인식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자연철학이라는 임의적 개념이 신학을 흐려놓고 인식을 흐려놓게 되어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합당하게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성이해로 그의 실제인식을 가늠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실재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았던 그 현상적 인식 즉 그의 보편으로써의 'cosmos'인식 즉 세상 안에 '스스로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보고 그것이 주입되어진 실존으로써의 신관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과 그러한 것이 현실에 대한 이해로 헤겔에서는 실제의식을 그곳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을 신격화하여서 주입시켜진 현상적 이해의 신으로써 규정하고 자충족해야만하는 당위성에서의 신관을 말하고 있는 헤겔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자충족의 하나님으로서 비로소 역사적 현실에 자신을 나타내신 분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이고 현실적인 것인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신에 대한 현상적 이해를 주입적 사유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써 이성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실재를 비로소 주장하는 자리에 서고 또 그 길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대적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헤겔의 신관에서 비롯한 이성적 현실적인 것이란 실제의식은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신관과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의 실존에 있어서도 이미 그 '정체성 시비에서 불가지론에 삼킨바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각주3)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이성적이고 이성은 현실적인 것'은 시대적인 한 사람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측면에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참된 신의 경륜을 비교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모두 그 사실성에 대한 재고에서 실재로서의 실제판단에서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그것은 헤겔의 입장에서의 신학과 신학적 인식과 신학적 비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 사실화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각주1) 비더만헤겔의 생애(서광사)에서는 헤겔이 튜빙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표현이 어눌하다는'식의 판단을 받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헨센이라는 자는 그의 종교철학의 체계에서 그를 천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주2) 헤겔, 철학 강요, 을지문화사 p. 62.

부언해설) 철학 강요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서 서론적으로 번역자의 입장에서 주의를 요한 바가 있다 그것은 법철학강요라고 하는 책은 전반적인 헤겔의 사상을 표현한 것뿐이고 정교한 가운데서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성가다머가 말한 것과 같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취득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함을 비로소 따른다면 그러한 말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부여되어짐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하면 그 모든 합리성에 대한 전반적인 재고를 앞설 수 있는 실제론적 입장의 비판적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헤겔이 그 법철학 강요를 쓰게 되어지는 그 때의 기독교인들이 실재론에 대한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인 차원이라고 보일 수 있는 비판이 합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는 헤겔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들의 표현적 입장의 합리적 그리고 실제적 입장은 달리하나 비판에 대한 실제적입장은 성립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판의 합리성의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여도 비판의 사실적 납득 당위성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서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그 때의 정황에 대한 헤겔의 반론으로 철학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철학이 무엇인가 알고 그 방법론에 준하여서 비판하는 것이 납득 당위성이 있다고 표현한 것이 일말의 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거두절미라는 개념의 실증적 개념에서 볼 때에 서론의 중요성이 평가가치절하되어질 수 있다는 것과 또한 본론이라고 하는 것의 중요성을 합리적으로 변호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헤겔도 그 관념의 현실화 정신의 현상적 실제라고 함에 있어서 전반적인 규정적 입장을 표현한 이 법철학 강요에 대한 것에 비판적 접근을 심각하게 받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서문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변명되어짐을 또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헤겔의 전반적인 실제인식에 대한 비판을 전반적으로 세울 수 있음을 말해둡니다.

각주3) 불가지론을 말하면서도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말하지 않는다고 반론하며 본인을 비판하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철학적 측면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을 의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적 여지에 따른 가해성의 가능성이라는 임의적인 합리성의 실존을 말하는 것인데 수행적 모순이라는 아펠의 입장을 후에 받아들일 때에 상대적인 측면의 대화하는 불특정 다수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에서 있을 수 있는 가해성적 전제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그러한 전제가 없는 가운데서 실존을 말할 수 있는 정당성을 기반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말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 인식적 판단의 미숙이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철학적 불가해성은 회의주의적 불가지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합의적 개념의 당위성이라는 설정 가능한 범주에서 동의되어지는 가운데 이야기 되어지는 가해성을 말하는 것뿐이며 더 나아가서 그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둡니다. 이것은 실재론에 대한 개념과 그것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시비에서 이미 그 합리성의 실존적 판단을 이미 가리기 때문입니다.


각주4) 이러한 것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 즉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봉건주의적 개념에서 빨리 대처하지 못한 가운데서 개체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현실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연사적 인식의 반영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헤겔의 신학과 같은 그의 논문집에 대한 재고적요청과 성경본문의 해석적 경향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하는 가운데서 그 합리성의 실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정당성 시비는 필요한 것임에 따라서 헤겔의 실제의식의 부정에 따른 전반적인 합리성의 재고를 말해두는 것입니다.


도움말: 헤겔의 신관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즉 주입되어진 사유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신격화되어진 것으로써의 스스로의 원리를 말한다면 이것은 그가 정의하는 절대라는 개념자존의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라는 개념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라는 개념을 상대적 절대라는 개념으로 바꾸는 것으로써 그 인식의 임의적 당위성을 말하는 것으로 왜곡시키는 잘못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도움말: 이러한 실재론과 그에 따른 개념적 규정에 의미를 상실했는데 그가 말하는 신학의 표현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재정립되어지고 바르게 규정되어져야 함은 그 당위성으로써 납득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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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7월 24, 2006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 개별로써의 창조과학적 신앙요소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

먼저 글을 씀에 있어서

글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과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 글은 옳고 그름이라는 사실논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과 관련되어진다고도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사실 논쟁으로써 규정되어지는 부류의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기준을 마음에 두는 것이 그 특정사실 논쟁에 대한 접근방법적인 측면에서도 또는 실제적인 실증적인 개념에서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합당함을 가진 가치관을 가진 가운데서의 개별적인 사실논쟁에 접근하는 것이 바름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다루게 되어지는 것은 노아의 방주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과학적 증거적 사실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모두 앞서 제가 말한 것에 대한 재고가 없음에 따라서 기본적인 비 성립적 근거를 비성립적 근거로 비판하는 바르지 못한 다른 영역의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바람직하게 정리되어질 수 없는 것을 정리되어질 수 없다고 비판하고 그것이 본래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도 지적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글이라는 점을 먼저 말해두겠습니다.


본론적으로

과학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과 그것의 진리값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의 사실과 관련있음을 말함에 있어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 상관성의 여부와 그 진위에 대한 사실적 시비를 가림에 있어서 먼저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먼저 개념적 정의가 합당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합당한 범주를 벗어나는 합리성의 표류는 현대신학의 모호성에서 사실논쟁적 기반이 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며 구교의 입장에서도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철학적 개념의 보편적 개념을 수용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1)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과학회에서는 상대적 개념에서의 충실한 자료적 근거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근거의 존립이라고 하는 것이 해석적 차원에서 절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진정한 신앙의 사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창조과학회에서 그러한 맹목적인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서 그 주장을 필요이상으로 절대화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그 자료를 인용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럼 창조과학회의 논문과 그 증거적 사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야 바람직한 것인가?

과학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의 다른 개념적 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이 비로소 신앙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것이 과학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것에서 재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현상적 인식으로써의 과학적 사실로서의 신앙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실존이 그 해석적 실존이 자체적인 증거적 사실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동의적 확신에 따른 것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식론적 기반에서의 존재로서의 사실개념은 신적 인식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만이 신앙적인 것이라는 점을 과학이 증거하는 것으로써 신앙적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도식적 언급을 한다면 과학적 또는 창조과학적인 개념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해서 비로소 신앙의 사실로써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따른 신앙적 사실이 창조과학적 개념에서 밝혀질 수 있는 요소와 사실여부가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럼 안티 기독교인들이 과학적인 입장 또는 개별적으로 창조과학적 입장을 비판함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함이 바람직한 것인가

안티 기독인들의 형식적인 측면만 본다면 과학과 신앙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제적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그 옳음이라고 하는 것도 기정 신앙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과학적 또는 창조과학적 개념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해서 비로소 신앙의 사실로써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이라면 그들의 논쟁에서의 합리성의 여부에 따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여지는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신앙적 사실이 창조과학적 개념에서 밝혀질 수 있는 요소와 사실여부가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분명한 현상적 인식으로써의 사실적 구성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사실논쟁의 성격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이 참됨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역사비평학의 종말'이라는 말이 가능한 것과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즉 역사적 사실(fact)이라는 것의 실존적 사실의 정당함은 진정한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특정 다수의 납득에 따른 개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실 논쟁이 방법적인 측면에서 가능성의 형태를 갖춤에 있어서는 참석한 특정 논객들의 서로의 합의적 범주의 임의적 설정에 따라 수행적 모순을 감수하고도 이루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결과야 어떻든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논점과 결론적 시비의 실존은 그 확실성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논쟁과 비판과 그 결론에 대한 실존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상대적인 불가지론적 입장의 판단 하에 있어 보이는 형식에 매이지 않으시고 그 상대적인 실존적인 사실을 가지고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상대적 확실성의 여부의 판단을 받지 않고 상대적인 신앙적 사실을 가지고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인식적 정당함을 가지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의 합목적성이 상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합리성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사실로서의 신앙의 사실이 상대적으로도 합당한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기독교인들의 입장의 합리성은 형식적인 개념에서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그 비판이 사실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티라는 상대적인 입장의 비판적 실존의 종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창조과학적 사실로도 신앙의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부인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하여 신앙의 요소가 비로소 확인되어질 수 없거나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서 창조과학적 개념의 사실을 연구하고 확인하는 것은 좋은 것이면서 힘써야 하는 것이면서 그것에서 비로소 신앙의 사실이 성립되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또는 그러한 연구되어지고 상대적으로 확인되어진 것들이 재고되어진다고 하여서 비로소 신앙이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생각을 좀 달리해야 할 것이며 안티들의 비판도 빗나간 것으로서 그 비판도 현명하지 못한 것이 되며 안티 기독인들의 입장적정체성의 이유로 삼는다면 그것또한 어리석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4)구체적인 본 노아의 방주에 대한 안티기독교인들의 질문들에 대하여서 몇가지 답변

안티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해를 전혀 인식론적 존재론으로 생각하여서 인간의 사고의 판단을 받는 존재로서의 자리매김을 인위적으로 상정하고 그 개념적 설정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성은 있으나 그 합리성의 실존적 정당함은 모호하고 주장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그 합리성은 절대적이지 못한 것으로 상대적인 모호함에서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신화라는 입장의 근거와 실재에 따른 실제적 입장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기각되어진 실제의 판단을 받는 부정된 전제이며 그러한 범주의 사유는 모두 부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상정한 기독교 하나님은 이미 자기들의 임의대로 거짓되게 꾸며진 각색된 하나님을 설정하고 부정임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즉 신화라는 개념 즉 이것은 니체의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사실 니체도 그 의지적 표현이지 진정한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를 신화로 하자는 전제적 의지의 표현은 사실의 실존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노아라고 하는 것을 인위적 개념에서 작성한 인어공주와 비교되어지는 인식론적 개념의 존재적 사실이라는 것을 비로소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문학의 보편성이해에 개념이 분별되지 못한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표현으로써의 노아의 방주와 그 현상적 인식이 가능한 요소들의 파편들의 실존을 임의적인 상대적인 범주에서 동일범주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절대에 합당하게 비교되어질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범주에서, 노아의 방주의 파편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부정되어진 범주에서 정당함을 찾는 합리성의 추구로 이미 부정되어진 사실을 말할 수 없는 합리성의 표류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합리성의 개체적인 언급들을 모두 재고한다는 것이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 마셔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이 의미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답변한다면

방주제작 과정에서의 재료의 부실, 동물 모으기, 동물 돌보기, 홍수 자체에 대한 해석등에 대하여, 그러한 답변이 가능한데, 전능자가 그러한 불합리해보이는 것에 국한되어서 그것을 못했다고한다면 그것도 상식적으로 납득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능자가 그것을 못한다고 말해야하는 당위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자의 상대적인 것으로도 말함에 있어서 사실성을 부여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적 인위성에 따른 판단에서 비로소 이의제기라는 것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그 정당함에 따른 창조적 과학적 사실을 구분해보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하겠고 구체적인 그 내용적인 것은 그 분야에서 다루게 되는 가운데서 참고할 수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종교개혁이후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개념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으로 돌아선 신학적 전통이 구교를 비롯하여서 현대신학에서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개념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고 구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즉 생성되고 있는 존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어지고 화이트헤드나 베르그송과 같은 자들의 형이상학도 역시 그러한 실재론이 하나의 진보적 개념의 존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현대신학은 결국 구교에게와 다른 사상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힘을 다 상실한 가운데서 들러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정당함을 부여할 실재론의 부재는 현상적 이해에서 따른 실재론과 그에 입각한 실제론을 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에 반론적인 것이 보편의 폭력을 비판하는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 포스트모던이즘의 영향으로 탈형이상학적 개념의 신론을 펴고 있지만 그것은 바르트와 폴틸리히의 비존재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상대적인 안티 개념에서의 구차한 신론일뿐 진정한 신론은 자존적 하나님의 실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함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논쟁에 휘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이라는 개념에 마음에 두면서 우리의 개별적인 현상적 이해로써의 상대적인 신앙적 요소의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에 합당한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들로서의 성도들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방주의 허구 2 성경의 허구 2005.12.24 23:02 비트만(roisonic) 카페스탭


노아의 방주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글로써 쓴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우스운 일이다.
그것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점을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자들이 노아의 방주가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궤변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대로 방주를 설계했을 경우 모든 동물을 태우고도 자리가 남는 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신화를 과학으로 증명해내겠다는 그들의 궤변에, 그 주장이 터무니 없음을 증거하는 진화론자인 Mark Isaak의 주장과 안티기독교인들의 반박을 소개 하겠다.

1) 방주제작
나무는 배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재료가 아니다.
목재는 만들어진 배가 부서지지 않도록 유지하기는 불충분하다.
배는 가해지는 충격에 몸체에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튼튼해야 한다.
목재는 조인트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할만큼 튼튼하지 않다.
특별히 대홍수속에서 방주가 마주쳐야 하는 파도치는 바다에서는, 현대의 가장 큰 목선은 약 300피트(90미터)인데 이것은 강화용 강철끈을 필요로 하고 너무나 많이 새기 때문에 끊임 없이 물을 퍼내야 한다.
그러나 성경속의 방주는 450피트 길이다.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창세기 6장15절]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100m 넓이 약 20m 높이 약10m 정도라고 한다.
바닥면적만 약 606평 정도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너무나 거대해서 목선으로서의 지탱할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버린다.

설사 그렇게 해서라도 방주가 제작되었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태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창조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중 덩치가 커다란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는 종으로 따지면 약 17,600종이 있습니다. 이 종류대로 각각 쌍쌍으로 실렸다면 35,200마리가 방주에 실려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평균하여 어른 양으로 환산해 볼 때, 방주는 125,280마리의 양을 실을 수가 있습니다. 서너배나 더 실을 수 있는 용량입니다."

창조주의자들은 어떻게든 노아의 방주를 입증하기 위해 지구상에서 가장많은 종과 수를 가진 절지동물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다.

절지동물은 위의 종의 전체를 다 합친것보다 더많다.
성경에서도 보면 땅에 기는것도 넣으라고 한다.

2) 동물들 모으기
모든 종류의 동물을 방주 근처로 모으는 것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다.
동물들이 어디서나 다 올 수 있을까?
만약 동물들이 지구상의 다른 여러곳에 있었다면 많은 동물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방주를 만드는 것보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을 수집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가능하다.
수만명의 생태학자가 전세계 곳곳에 파견되어 모든 생물들을 수집한다고 해도 해내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창세기 7장 4~10절에 노아는 단지 7일만에 모든 생물의 암수 한쌍씩을 배에 태웠다고 한다.

어떤 동물, 예를들어 나무늘보나 펭귄은 육지를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코알라나 많은 곤충들은 특별한 먹이가 필요하다.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가져왔는가?
동굴에 사는 어떤 절지동물은 상대습도가 100%가 아니면 살 수 없다.
도도(지금은 멸종된 뉴질랜드에 살았던 거대한 날지 못하는 새)와 같은 몇몇 동물들은 동물들은 섬에서만 살 수 있다.
안 그러면 다른 동물들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대륙의 몇몇 종들 예를들어 쥐라던가 돼지같은 것이 섬에 유입되면 섬안의 토착종들을 멸종시킨다.
홍수전에 이러한 종들은 만약에 이것을 잡아먹을 수 있는 동물들과 대륙에 산다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몇몇 창조과학자들은 모든 동물들이 방주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노아는 생물을 수집하러 이동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기후와 환경에 맞추어져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이 한지역에 모두 존재했다는 억지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종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종들을 멸종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야크와 케트살과 질라 몬스터(Gila monster)가 온화한 지역에 같이 살 수 없는 이유이다.
이들은 같은 지역에서 특별한 도움을 받지 않고는 오래살 수는 없다.
유기체는 그들이 치명적인 불리함을 가지는 곳에서는 살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멸종은 유기체가 선호하는 지역이 파괴됨으로 일어났다.
모든 생명체가 함께 공통된 기후조건에서 살았다고 하는 창조과학자들의 제안은 단 한가지 환경을 제외한 모든 환경이 파괴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살 수 있는 종은 절대로 많지 않다.

또, 동물들은 어떻게 방주에 올라 탔을까?
모든 동물이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는 것은 시설적인 면에서도 불가능하진 않지만 극히 비현실적이다.
노아는 동물을 실을 수 있는 기간이 7일밖에 없었다.
만약 15764동물들이 여기를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모든 동물은 38초만에 쉬지 않고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야 할 동물이 더 많았기 때문에 시간은 더욱 부족했을 것이다.
7일말에 동물을 수집한다는 것도 불가능 하지만, 이 동물들을 7일안에 방주에 태우는 것만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동물을 태워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동물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Woodmorappe 과 Whitcomb & Morris같은 창조주의 자들은 자의적으로 포유류나 조류나 파충류를 제외하고는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살수 있었다고 규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부분의 육지의 절지동물, 달팽이류, 민달팽이류, 지렁이 같은 땅속 곤충등등도 물속에서는 생존할 수가 없다.
이런 생물들도 방주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

창세기에는 정결한 동물은 7쌍씩,보통은 암수 한쌍씩 태우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정결한 동물이 방주에 탔는가?
정결한 동물이 기본적으로 반추동물 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현재 69개의 속에 192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체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추동물은 포유동물중에서 가장 큰 동물중에 속한다.
그러므로 부피는 심각하게 커진다.

정결한 새들은 무시해도 될 만큼 작지만 성경의 창세기 7장 3절에서는 새들은 모든 종류가 7쌍씩 방주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각 동물을 속이 아닌 종별로 모았다면 전체의 숫자는 3~4배가 증가한다.
이들은 무게가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체 질량을 2-3배 증가시킬 것이다.
포유류, 조류, 파충류뿐만 아니라 모든 육지의 동물을 포함시킨다면 부피는 크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많기는 하지만 작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돌봐야 하는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명시된 방주는 지금처럼 많은 동물과 그들의 먹이를 싣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되지 않는다.
특히 방주가 멸종된 종까지 포함시킨다면 더더욱 그렇다.

또한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식물(植物)도 호흡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속에 잠긴 육상식물은 얼마 못가서 대사작용을 하지 못하고 썩어버리고 만다.
대홍수가 사실이라면, 노아 홍수 때 식물은 전멸됐을 것이며, 유기물을 합성할 수 없어서 먹이사슬의 단절로 마침내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멸절됐어야 말이 된다.

그리고 모든생물은 암수한쌍씩, 정결한 동물은 7쌍씩 살아남았다고 한다면 근친상간에 의한 도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수가 있을까?
예를들어 멸종위기에 처한 지리산 반달가슴곰에 대한 방송에서, 많은 사람들이 밀렵만 막으면 반달가슴곰이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방송 한적이 있다.
그 이유는 근친 교배에 의한 도태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지리산 반달가슴곰의 개체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그러한 근친 교배가 이루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한 반달가슴곰도 이러할진데 대홍수이후 살아남은 모든 생물들은 어떻게 될것인가!

3) 동물들 돌보기
동물들에게 먹일 음식의 양을 헤아리기 위해서 대홍수가 얼마동안 있었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27일에 발생하여, 40일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에서 물이 줄어든 것은 150일 이후였고, 7월17일날 아라랏산근처에 도착하여, 40일후에 까마귀와 비둘기를 여러차레 보내고, 이듬해 2월27일 땅이마르고, 여호와가 노아에게 배에서 나오도록 명령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홍수의 기간은 약1년이 된다.
배에 실은 동물들이 약 390~430일 동안 먹을 음식과 물의 량은 그 동물의 무게와 부피의 10배 이상이 되어야 할 테니 모든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잘 알아 듣고 제자리에서 먹고 싸는 행동만 할 경우에도 배의 바닥면적이 600,000평(거의 여의도면적)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많은 동물들은 특히 곤충들은 특별한 먹이를 먹는다.
예를들어 코알라는 유칼리투스 잎만을 먹고 누에는 뽕나무 잎만 먹는다.
수천종류의 식물에 (아마 거의 대부분 식물) 그 종류의 식물만 먹는 동물이 있다.
어떻게 노아는 이러한 모든 종류의 식물을 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디서 그런 식물을 구했을까?

그리고 어떤 동물은 육식만 한다.
그들중 일부는 먹이를 매우 선별해서 먹는다.
예를들어 작은 포유류나, 곤충이나 물고기나 혹은 수중 무척추동물을 먹는다.
어떻게 노아는 이것을 결정해서 이들에 맞는 모든 식사를 준비했을까?
대부분의 거미들은 먹이가 진동하는 것을 감지해서 잡아먹는다.

창조주의자들은 부피를 가능한 줄이기 위해서 동물들의 양식을 다져 넣었다고 우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져넣고, 압축하고, 오래보관된 것을 먹지 않는 생물도 상당수 존재한다.
즉, 어떤 동물은 매우 신선한 음식만 먹는다.
예를들어 많은 뱀들은 오직 살아있는 먹이만 먹는다.
(최소한 움직이거나 아니면 아직 식지 않은 것)
대부분의초식 곤충은 신선한 풀을 필요로 한다.
사실상 진딧물은 시들은 잎에서는 빨아먹을 수 없다.
어떻게 노아는 이렇게 식물들은 시들지 않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동물들을 불러모으는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동물의 습성에 맞게 먹이를 구하는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먹이를 수집했다고 하더라도 음식물의 부패는 오랜 항해의 주요 문제이다.
이 문제 때문에 캔이나 냉장고가 개발되었다.
배안의 습기는 곰팡이들에게는 최적의 조건일 것이다.
노아가 어떻게 이것을 제대로 보관했을까?
창조주의자들의 반주안의 동물들의 먹이의 양에 대한 계산에는 음식이 부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것은 전혀 계산하지도 않았다.

또, 방주는 열기나 습도, 그리고 밀집되어 있는 수 많은 동물들이 만들어 내는 배설물들 (메탄, 이산화탄소, 암모니아)때문에 통풍이 잘되어야한다.
창조주의자 Woodmorappe(pp. 37-42)은 창세기 6:16을 이용해서 18인치의 입구가 방주의 가장 위쪽에 있었기 때문에 미풍이 불고 충분히 환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창세기 6장 14절~16절에는 방주는 3층으로 나뉘어져있고 분리된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어떻게 신선한 공기가 이러한 구조를 순환할 수 있었을까?

특히 반추동불들은 하루에 배설물을 몇톤이나 배설할 것이다.
배설물들이 아래층에서 나온다면 (아마도 2층까지도)이것은 수면 아래이기 때문에 이것을 치우기 위해서는 위층으로 올려져야 한다.
어떻게 몇 명 않되는 사람으로 이렇게 엄청난 배설물을 치울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8명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동물원보다 더 많은 동물들을 다룰 수 있었을까?

4) 홍수 그 자체
도데체 홍수는 언제 일어났고 그 엄청난 물들은 어디로 가 버렸나?
또한 홍수의 원인도 하늘의 물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물이 솟아 나온 것(7장 11절)으로 되어있다.

이점에 대해서 창조주의자인 Whitcomb & Morris에 의해서 제안된 수권층 모델이 있다.
이것은 태초의 지구의 창공에 수권층이 있어서 노아의 홍수때 내리는 비가 하늘의 수권층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장 6~7절]

위에서 언급한 하늘의 궁창이 하늘의 수권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며,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엄청나게 장수한 것도 이 수권층이 고 에너지를 지닌 고주파 방사선을 완전히 제거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주파 방사선은 인간의 세포를 파괴하고 급격한 노쇠현상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고주파의 하나인 X선과 같은 것은 인간에게 극히 해로워서 임산부가 X선촬영을 두 번이상 하게 되면 태아에게 해롭다.
또한 이 고주파는 지상에 있는 공기 중 산소와 충돌하여 인간에게 아주 해로운 물질인 오존을 형성 시키기도 한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창조주의자들은 대홍수이후, 수권층이 사라져 버리자, 인간의 수명이 짧아 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권층이 존재했다면 40 feet정도의 물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대기압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산소의 압력과 질소의 압력은 유독한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더욱이 고주파선도 들어오지 못하는 수권층 때문에 가시광선조차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시광선은 자외선보다 파장이 길고 에너지도 낮으므로, 자외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가시광선역시 통과하지 못한다.

그럼 왜 오존층은 자외선을 막을까?
그건 오존이 분해하고 다시 결합하면서 고에너지의 자외선층을 흡수하고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낮은 자외선이 지상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자외선이 차단되는 것은 아닌것이다.
또한 그런 자외선이 없으면 식물의 광합성 대사율이 떨어진다.
즉 죽을수도 있다.

그리고, 수권층이 대홍수때 땅으로 비가되어 내려왔는데 그 엄청난 양의 물은 어디로 간것일까?
그 물이 기화되서 창공으로 날아가 우주권밖으로 가버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엄청난양의 물이 한꺼번에 끓어올라 기화되서 우주권밖으로 날아갔다면 노아와 그 가족은 아마 완전히 뜨거운 온도속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또 수권층이 존재 했다면 이것은 상당한 두께로써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 뿐만이 아니라 모든 빛을 차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홍수전의 지구의 온도는 엄청나게 차가웠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물이라도 오존층 위에 있다면 UV에서 보호받지 못한다.
빛은 이것을 물분자로 다 나누어 버렸을 것이다.

창조주의자인 Hydroplate. Walt Brown'은 창세기 7장 11절에 근거하여 물이 지하의 물층에 있다가 지각 변동으로 대기권 밖으로 나왔다가 비가 되서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층속 1마일 깊이로만 있어도, 지구내부는 끊는 듯이 뜨겁다.
따라서 저장된 물이 과열되었을 것이다.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물이 화산폭발처럼 배출되면서 갈라진 틈을 분명 침식시켰을 것이며 이것은 제대로 나뉘어지지 않은 현무암의 침식지역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이런 갈라진 틈 사이에 많았을 것이고 거리가 멀수록 드믈 것이다.
노아는 분명히 비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암석마져 조심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대는 매우 찾기가 쉽다.
하지만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주장역시 엄청난 양의 물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의문은 역시 풀수가 없다.

세번째로 Kent Hovind는 홍수의 물이 혜성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역시 이 문제도 위치에너지에 위해서 발생하는 열을 간과하고 있다.
대부분의 혜성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하면 마찰열에 의해 부서져 버린다.
물론 아주 큰 혜성일 경우엔 완전히 타버리지 않고 지구에 불시착할 경우가 있는데, 액체의 경우는 이것과 다르다.
물은 지표면에 닿기전에 모두 수증기가 되었을 것이다.

창조주의자들의 또 하나의 가설은 John Baumgardner의 Runaway subduction설이다.
이 모델은 홍수전 암석권 (대양바닥층)이 맨틀보다 밀도가 높아서 가라앉는 것을 가정했다.

이 과정중에 발생하는 열은 맨틀의 점도를 감소시키고 이과정은 파국적으로 가속된다는 것이다.
모든 원래의 암석층이 가라 앉았기 때문에 올라오는 마그마가 이 자리를 대체했고 이것이 해양바닥을 높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수면을 높이고 150일간 비가 올 수 있도록 끓는 에너지를 공급했다는 것이다.
식기 시작할 때 해양바닥은 다시 내려갔고 홍수의 물은 물러났다는 것이다.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산들 예를들어 시에라나 안데스는 홍수가 지난후에 지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융기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적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지구의 열확산정도는 이러한 침강이 일어나려면 1만배 이상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야 새로운 ocean floor를 식힐 수 있고 퇴적암으로 된 산들이 수천만년이 아니라 짧은 시간안에 올라올 수 있다.

Baumgardner 는 침강되면서 발생되었을 열확산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것은 모든 대양의 물을 끓이고도 남는다.
게다가 Baumgardner 은 맨틀이 홍수전에 훨씬 뜨거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열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이 모델에 의하면 신생대층은 홍수 이후에 생긴 것이다.
신생대 이후의 기록만 하더라도 6천 5백만 년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한 양의 포유류와 피자식물이 분화해 나갔다.

Baumgardner이 제안하는 방법으로는 현재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화산폭발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홍수 모델은 (위의 것을 포함해서 Hovind의 것만 빼고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지표의 지형은 이들 모델에 따르면 홍수 기간에는 매우 평평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 격변을 통과하면서 산들은 융기하고 바다는 내려갔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지구의 약 1/4정도의 부분의 밀도나 온도가 변화하여 몇 달만에 지표가 올라가거나 내려갈 만한 어떠한 메카니즘도 제시한 바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홍수모델로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많은 침전물들이 높은 고원지대에까지 있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침전물들은 물이 천천히 흐르거나 완전히 멈출 때 까지 이동하게 된다.
만약 바다에서 물이 멈추게 된다면 침전물이 그곳에 더 많을 것이다.

Baumgardner의 모델에 의하면 홍수기간에 물의 흐름은 바다의 흐름보다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대강 대륙의 침전물들은 거의 제거되고 바다에 쌓이게 된다.
그러나 대양의 지각의 두깨는 약 0.6 km이지만 대륙이 지각은 평균 2.6km이다.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물이 대륙에서 빠져나갔다면 이것은 분명히 엄청난 물의 흐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를들어 이런 것들은 워싱턴 주의 스카블란드 지역의 얼음댐이 무너지고 나서 물이 빠지게 되면서 생긴 것들이나 지중해의 서쪽의 지형(지브롤터 해협이 갈라지면서 생긴것)과 비슷할 것이다. 이러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조건에서 방주가 살아남았는가?
이러한 지형을 모두 바꾸는 엄청난 과정이 겨우 몇 달동안 일어났는데 이러한 것들은 쯔나미를 만들어 냈을 것이고 이것은 당연히 지구를 전체 한 바퀴 돌기에 충분하고 이러한 것의 여파는 그로부터 수년간이나 지구를 황폐시켰을 것이다.(쓰나미라는 것은 해저에서 발생된 지진등으로 생기는 파도인데 파도의 크기가 해양속에서부터 생겼기 때문에 생성된 깊은 바다위의 파도는 매우 약해 보이지만 바다의 깊이가 낮아지게 되면서 파도가 높이 솟구치게 되며 이것은 엄청난 크기의 파도로 해안을 강타한다)

5) 홍수의 증거들은 있는가?
전 지구적인 홍수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증거들과 반대가 된다.

어떻게 우리가 아는 산들의 상대적인 나이를 설명할 것인가?
예를들면 네바다의 시에라는 아팔라치아 만큼 침식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왜 아이스코어에 홍수의 증거가 하나도 없는가?
그린랜드의 아이스코어는 일년의 층(연륜)을 이용해서 연대를 4만년전 까지 알 수 있다. [Johnsen et al, 1992; Alley et al, 1993]
전 지구적인 홍수는 분명히 여기에 충분한 침전물들을 남길 것이다.
또한 염농도의 변화라던가 산소동위원소의 변화라던가, 혹은 하늘에 떠있었던 부유물, 열에의한 변형된 흔적, 안에 들어있는 공기방울의 변형이나 다른 모든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증거들이 보이지 않는가? (역주 : 아이스코어란 그린랜드의 얼음을 시추해서 보관하는 것으로 이것은 약 4만년까지 연대측정이 일년 단위로 된다.
산소 동위원소의 변화가 마치 나이테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최근에는 전기전도도를 이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더욱 치밀한 자료를 제공한다.)

어떻게 극지방의 빙하가 가능한가? 홍수를 일으킬 만한 양의 물이라면 빙하를 기반부터 떨어뜨려 물에 띄울 수 있을 것이다.
빙하는 빨리 자라지 않는다.
사실상 그린랜드의 빙하는 최근 1만년 동안의 기후조건에서는 성장하지 않는다. ( 최근 1만년간은 매우 기후가 안정되었음)

왜 홍수는 바닷의 침적물층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가?
일년간이나 지속된 홍수라면 바다 바닥의 코어에 분명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즉, 엄청난 양의 육지에서 내려온 암석 파편, 침전층에 여러 종류의 크기가 동시에 분포, 산소 동위원소 비율의 변화(비는 해수와 산소동위원소 성분이 다르다. 18O로 이루어진 물이 바닷물에 더 많다.), 대량 멸종의 흔적 , 기타 다른 증거들......왜 이런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왜 나이테를 이용한 연대측정에 이러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가?
나이테 기록은 지금부터 1만년 전까지 올라간다.
물론 여기에 홍수의 기록 같은 대 재앙은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Becker & Kromer, 1993; Becker et al, 1991; Stuvier et al, 1986]

6) 지질학적 기록의 생성
많은 사람들은 전지구적 홍수가 현재나타나고 있는 전체의 지질학적 지층과 화석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우리들은 이러한 지층은 천천히 형성되며 여러세대가 걸리며 시간적인 순서로 되어 있고, 진화가 일어났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서로 반대되는 증거들이 있다.

화석이 진화에 맞도록 연대측정이 되고 이것이 그것에 알맞도록 배열되었다고 하기전에 지질학적인 지층과 상대적인 시간은 신의 창조를 믿는 사름들에게서부터 다윈이전에 이미 알려진 것이다.(See, for example, Moore [1973], or the closing pages of Dawson [1868].)

왜 지질학적 시대는 전 지구적으로 일치하는가?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지질학적 시기가 서로 일치하고 방사선 동위원소연대측정이나 다른 연대측정에서 서로 일치하는 결과가 나오는가?[e.g., Short et al, 1991]

어떻게 화석 기록은 진화에 편리하도록 이렇게 잘 정렬되었을까? 생태학적으로 잘 층이 구분되고 수력학적으로 잘 분류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아주 극도로 잘 정렬되서 관찰된다.
왜 한 마리의 공룡이라도 코끼리와 같이 지표에서 발견되지 않는가

식물들과 다른 운동성이 없는 생명체간의 상대적인 위치([Yun 1989]는 선캠브리아기의 퇴적물로부터 아름답게 보존된 조류(algae)를 묘사하고 있다. 왜 다른 현대적으로 보이는 식물들은 지질적으로 오래된 위치에는 나타나지 않는걸까 ?
왜 연체동물 같은 일부 생물들은 많은 지층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
왜 (완족류 같은) 생물들의 여러 종류들이 수력학적으로 매우 유사한데도 (거의 같은 크기, 모양, 무게를 가졌는데)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을까 ?
왜 현재의 동물들과 같은 생태학적 공간에 실던 멸종한 동물들은 함께 살아남지 못했나 ?
왜 익룡들은 높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나 ? (날개가 있었으니 죽지 않기 위해 날아봤다가 나중에 물에 빠져죽었을 텐데.)
수백 피트 두께와 몇 마일에 달하는 길이의 산호초들이 어떻게 그 아래의 화석과 맞닿은 채로 보존되었을까 ?
왜 낮은 (오래된) 지층에는 작은 생물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을까 ? 유체역학으로 보면 작은 생물들은 더 천천히 가라앉아서 더 상부 지층에 쌓일 텐데.
왜 인공물이나 기타 발자국 같은 것 역시 잘 정렬되어 있는가 [Crimes & Droser, 1992]
왜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물들은 가장 위층에서만 발견되는가? 홍수가 일어났던 시기에 이런 것들이 왜 삼엽충이나 공룡들의 화석과 서로 섞이지 않았는가?
왜 같은 유기체의 서로 다른 부분이 같이 정렬되어 있는가? 꽃가루와 포자와 줄기와 잎과 가지와 뿌리들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되는가? [Stewart, 1983].
왜 생태학적 정보들이 한 지층에서는 일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층사이에는 일관성이 없는가? 식물들은 각각 독특한 꽃가루를 가지고 꽃가루 화석이 어느 식물의 것인가를 판별함으로써 상이한 지층에서 기후가 어떠하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떻게 표면아닌 부분에서 지표면에서만 형성되는 것이 보이는가?

어떻게 대홍수가 경사단층을 설명할 수 있을까?
대홍수가 경사 단층들, 즉 어떤 퇴적 지층들이 크게 변형되고 (예: 기울어져서) 두 번째 지층이 그 위에 쌓이기 전에 침식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 볼 수 있는 변형, 침식, 풍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층들은 퇴적이 최소한 두 번 이상의 시기(게다가 단층이 두 번 이상 있는 경우도 있다)에 걸쳐 이루어지고 이러한 형태의 변형,침식, 기후를 설명하려면 이 시기 사이에 긴 시간이 흘렀다는 설명이 필요한데.

산과 계곡들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많은 높은 산은 퇴적암들로 이루어져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대양의 바닥에 서식하는 바다나리의 화석을 함유한 심해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Gansser, 1964].)
만약 바다나리가 홍수 중에 묻힌 것이라면 (산이 된 해저는) 어떻게 현재 높이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며 산들 사이의 계곡은 언제 침식되었나?
많은 계곡은 빙하 침식에 의해 깎여나갔다는 점을 기억하라.
이것들은 매우 느리게 진행한다.

화강암 저반(granite batholiths)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화강암 저반(granite batholiths)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
이 중 일부는 더 오래 된 퇴적암들을 뚫고 침입했으며 이 (화강암)의 마모된 표면 위에 젊은 퇴적암들이 쌓여 있다.
마그마가 식어서 화강암이 되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걸리며 화강암이 마모되는 것도 신속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에를 들어 South Mountain 저반과 Meugma Group 퇴적암의 접촉 및 각진 단층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1989년의 Donohoe와 Grantham의 문헌을 보라.]

한 번의 홍수로 어떻게 극히 상세한 층이 생길 수 있나 ?
어떤 지층은 두께가 6 km에 달한다.
만일 이것이 자리잡는데 400일을 허용하고 홍수 이후의 압축은 무시한다고 해도 하루에 15 미터의 퇴적물이 쌓인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암석의 화학적 성질에 따라 아주 깔끔하게 층층히 쌓여 있다. (예를 들어 수직방향으로 몇 센티미터 내에 탄소성분 비율에 따라)
어떻게 하루에 15 미터씩 쌓이는 격렬한 대홍수 상황에서 이렇게도 깔끔하게 정렬이 일어날 수 있을까?
탄소 성분이 많은 퇴적층이 10000 제곱 킬로미터의 영역에 30분 동안 쌓이고 다음에 탄소 성분이 적은층이 30분 동안 쌓이고 다음 30분 동안...당신은 설명할 수있는가? [Bill Hyde, Kent & Olsen, 1992]

와이오밍 지역의 그린리버 지역은 2천만개의 일년단위의 층이 있다.
이러한 유사한 것들은 다른 지역의 호수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침전은 매우 입자가 작기 때문에 한층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라앉는데만 한달이 넘게 걸릴 것이다.

어떻게 홍수 퇴적물이 숲의 화석의 층을 만들었는가?
열 개도 넘는 완전한 숲(쭉뻗은 나무줄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뿌리, 잘 발달된 토양을 갖춘)들이 층층히 쌓여 있음을 보여주는 층서학상의 (stratigraphic) 구조들이 여러곳에서 나타난다.
한 예가 Fundy 만의 Joggins 지역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약 2750m의 두께로 (48km의 바다 벼랑을 따라서) 여러개의 제자리에 있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층들은 서로 수백 피트 떨어져 있기도 하며 숲이 화재가 일어난 것도 보여주고 있다. [Ferguson, 1988. For other examples, see Dawson, 1868; Cristie & McMillan, 1991; Gastaldo, 1990; Yuretich, 1994.]
창조론자들은 세인트 헬렌즈 산 아래 호수에 가라앉아 있는 통나무들을 가지고 홍수가 수직으로 뻗은 나무줄기를 쌓는 방법의 예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홍수에 의한 퇴적은 뿌리와 토양의 존재및 층쌓기등 그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열은 어디로 갔는가?
만약 지질학적 기록이 일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래의 사건들은 엄청난 열을 발생시킨다.

지질학적 기록은 약 8 x 1024 그램의 용암과 뜨거운 물질이 관입되었다.
대강 비열이 0.15라고 하더라도 마그마는 5.4 x 1027줄이 1100도에서 식으면서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마그마가 결정화되면서 더 많은 열이 발생했을 것이다.

또 석회암이 형성도 그렇다.
대강 5 x 1023 그램의 석회암이 지구에 퇴적되어있다. [Poldervaart, 1955]
그리고 방해석이 되면서 약 11,290 joules/gram [Weast, 1974, p. D63]을 내놓는다.
만약 창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10%의 석회석이 홍수중에 생겼다면 5.6 x 1026줄의 열이 발생되고 이것은 홍수의 물을 모두 끓여 버릴 수 있다.

운석의 영향으로 홍수가 발생했다는 창조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침식과 지각의 이동은 지구상의 운석이 만든 크레이터를 지워 버릴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의자인 Whitcomb 와 DeYoung은 달과 수성의 크레이터는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해야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달의 가장 운석의 충돌은 3 x 1026줄을 발생시킨다.
같은 크기의 운석이 만약 지구에 떨어진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열을 발생시킬 것이다. [Fezer, pp. 45-46]

다른 가능한 중요한 열의 발생원은 방사성 동위원소 붕괴이다. (일부 창조주의자들은 홍수중에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가 더 빨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생물학적 분해 (퇴비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퇴적물의 압축에 의해서 발생하는 열이다.

5.6 x 1026줄은 대양의 물을 끓이는데 충분하다.
3.7 x 1027줄이면 모든 물들을 증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공기와 수증기는 1도를 올리는데 열량이 매우 적게 소모되므로 쉽게 1000도가지 올라갈 수 있다.이러한 온도에서는 대부분의 대기가 지구밖으로 날아간다.

대기를 잃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구는 지구는 열을 복사로 내놓은 방법밖에는 없다.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뜨겁지 않다면 태양에서 오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효과적으로 내보낼 방법이 없다. (지금은 거의 열평형을 이루고 있다.)
만약 수백만년 동안 식지 않았다면 지구는 아직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울 것이다.

앞서 보여주었듯이 모든 홍수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기작들은 물을 끓일 수 있기에 충분한 열을 제공한다.
이러한 것들은 열에 대한 문제를 더 어렵게 할 뿐이다.

석회암은 어떻게 해서 쌓였을까?
석회암은 엄청난 수의 미세한 바다 동물들의 뼈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퇴적층은 두께가 수 천 미터나 된다.
이 모든 동물들이 홍수가 시작될 때 살아 있었나?
그렇지 않다면 이 퇴적물 속의 잘 정리된 화석들의 순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략 1.5 x 1015 그램의 CaCO3 가 대양의 밑바닥에 매년 쌓인다. [Poldervaart, 1955]
홍수가 일어나기 5000년동안 지금의 퇴적 속도보다 열배는 더 많이 쌓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전체의 0.02%의 석회암 퇴적보다 적은 양을 설명할 뿐이다.

홍수가 어떻게 백악(chalk : 가루가 되기 쉬운 석회암)을 형성했을까?
대체로 백악은 직경이 700 ~ 1000 옹스트롬인 동물성 플랑크톤의 사체로 만들어진 것이다[Bignot, 1985].
이 정도로 작은 물체는 .0000154 mm/sec의 속도로 쌓인다[Twenhofel, 1961].
1년간의 홍수 동안 1/2 미터 정도 쌓일 것이다.

창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홍수가 소금층을 쌓을 수 있을까?
창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가끔 몇 미터나 되는 폭의, 바다 화석을 함유한 퇴적층 사이에 놓여진 고체 소금층이 있다.
이러한 소금층은 소금물에 담수가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증발될 때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금층은 지질시대 중 대체로 무작위한 횟수로 생길 수 있고 층의 양쪽에 특별한 종류의 화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화석이 파국적인 홍수동안에 놓여진 것이라면 오직 두 가지 경우만이 있을 것이다.

첫째, 소금층 역시 같은 시기에 놓여졌다. 홍수를 발생시킨 폭우 속에서.
또는 둘째로 소금은 나중에 침투했다.

이 두가지 모두 지질층과 그 화석을 홍수가 쌓았다는 이론으로는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일 것으로 생각한다. [Jackson et al, 1990]

퇴적물들은 어떻게 홍수 이후의 그 짧은 기간내에 재결정화되고 소성 변형될 수 있었을까 ? 예컨대 Death Valley National Monument(Wildrose Canyon Rd., 15 mi. south of Hwy. 190)의 늘어진 역암은 규암으로 변성되고 원래 길이보다 3배 이상 늘어난 자갈들을 함유하고 있다.
소성 변형된 돌은 salt diapir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Jackson et. al., 1990].

적철광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표준적인 이론으로는 그것들이 지구의 대기가 다량의 산소를 함유하기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소가 풍부한 상황에서는 그것은 거의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다.

화석의 광물화를 어떻게 설명하나?
광물화란 원래 있던 물질들을 다른 광물들이 치환한 것이다.

현대의 동물상(fauna)의 묻힌 뼈대는 성서 고고학에서 꽤 오래되었다고 말하는(현재에 해당하는 홍적세 지질의 지구나이의 상당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도 포함해서 아주 미미하게 광물화되어있다.
예컨대 모세 시대에 묻힌 이집트 평민의 유해는 심하게 광물화되어 있지 않다.
멸종된 포유 동물상의 유골이 묻혀진 것을 보면 상당히 광물화의 정도가 다양하다.
공룡의 유골은 종종 심하게 광물화되어 있고, 삽엽충(trilobite)은 대개 광물화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있는 같은 종의 화석은 다른 광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측결과를 어떻게 하나의 대홍수 중에 유해가 차곡차곡 쌓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나 ?

홍수는 어떻게 '산호시계'의 정확성을 설명할 것인가?
달은 지구의 회전 에너지를 서서히 약화시키고 있다. 지구는 먼 옛적에는 보다 빨리 회전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는 하루가 24시간보다 짧았고 1년에는 더 많은 날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산호는 매년 성장층 당 매일의 성장층의 수효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예컨대 데본기의 산호는 1년에 거의 400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화석(산호, stromatolite, 및 기타 몇 종류 - 세계 전역의 지층들에서 수집된)의 추정된 연대와 그들의 성장 패턴이 보여주는 1년간 날짜수 사이에는 아주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들 시계와 방사능 연대측정 및 superposition 에 관련된 이론들의 일치성은 300일간의 홍수 동안의 불행한 우연의 일치의 결과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Rosenberg & Runcorn, 1975; Scrutton, 1965; Wells, 1963]

'화석화된 동물은 다 어디에 살고 있었는가?' Schadewald [1982] 은 아래와 같이 썼다: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지구의 암석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을 노아의 대홍수 때 멸망한 동물의 유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종 그들은 "화석의 무덤"에 있는 화석의 수효를 홍수의 증거로 인용하고 있다.
특히 창조론자들은 아프리카의 Karroo 층군에 매혹된 것 같은데 여기에는 8000억의 척추동물의 화석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ee Whitcomb and Morris, p. 160; Gish, p. 61).
가짜 과학자인 창조론자들은 그 모든 화석화된 동물들이 홍수때 죽었다는 그들의 가설을 시험해보지 않았다.
미네소타 대학의 고생물학자인 Robert E. Sloan은 Karroo 층군을 연구했다.
그는 그곳의 화석화된 동물들은 도마뱀같이 작은 것으로부터 소만큼 큰 것까지 존재하며 그들 동물의 평균적인 크기는 아마 여우만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잠깐 동안 계산기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그 8000억 마리의 동물들이 살아나기라도 했다면 지구의 모든 육지에 1 에이커(4046,8 m2)당 21마리(내생각으로는, 아주 적게 잡아도)가 있게 될 것이다.
Karroo 층군이 지구의 척추동물 화석의 1 퍼센트를 점한다고 (조심스럽게) 가정해보자.
그러면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조그만 뒤쥐(shrew)부터 거대한 공룡에 이르기까지 에이커 당 최소한 2100마리의 동물이 살아있었다는 말이 된다.
창조론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조금 붐비는 듯하다

1000km에 이르는 북극해에 연한 평원에는 레닌그라드의 전문가 말에 따르면 대략 500,000 톤의 (매머드의) 엄니가 있다고 한다.
홍수가 있기 전에 이들 매머드가 살아있었다면 러시아의 끝에서 끝까지 매머드로 덮여 있었을것이다.

화석 기록으로 남은 엉청난 양의 유기물은 어디서 왔는가?
전세계에는 약 1.16 x 1013 metric tons 의 석탄이 저장디어 있고 이것의 약 100배의 유기물들이 퇴적되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숲을 생각하고 이것이 전 지구를 다 덮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겨우 1.9 x 1013 metric tons뿐이다. [Ricklefs, 1993, p. 149]

그리고 어떻게 상대적으로 수중 화석이 더 흔하게 발견되는 것을 설명하겠는가?

홍수는 모든 것을 같이 쓸어 버렸다.
그러므로 육지의 유기체들은 아마 수중 유기체와 거의 숫자가 같거나 창조론자들이 말하는대로 육지가 더 넓었다고 생각하면 외히려 더 많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화석은 얕은 해양 환경에서 생긴 것들이다.

7) 종들의 생존과 홍수후의 생태계
여호와는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짐승들, 길짐승과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살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셨다 라고 성경의 창세기7장 23절에 말하고 있다.
홍수가 성경의 기술그대로라면 아래의 내용은 최소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현대의 식물종들이 살아남았을까?

많은 식물 (씨와 전체)은 몇 달동안에 물에 잠겨있으면 죽게 된다.
이것은 특히 소금물에 잠기면 명확하다.
어떤 망고나 코코넛이나 기타 해안에 있는 종들은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
많은 씨들은 바닷속에 수 피트 (혹은 수마일까지) 묻혀있을 것이다.
이것은 싹을 티울 수 없다.

많은 식물들은 토양이 형성되야 자란다. 토양은 홍수중에 다 쓸려 나갔을 것이다.
어떤 종류들은 불에 노출되고 나서 혹은 동물에 의해서 소화되고 나서 발아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은 홍수후에는 매우 드믈었을 것이다.

노아는 모든 식물의 씨앗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식물이 씨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일부의 씨앗은 발아하는데 수년을 묵혀두면 살아남지 못한다.[Garwood, 1989; Benzing, 1990; Densmore & Zasada, 1983]
또한 어떻게 그는 이것들은 전세계에 퍼뜨렸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모든 물고기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나?
어떤 종류는 차고 깨끗한 물을 필요로 하고 어떤 종류는 탁한 물, 어떤 종류는 바닷물을, 심지어 어떤 종류는 바닷물보다 더 짠 물을 필요로 한다.
홍수는 최소한 이런 생존환경 중 일부를 파괴했을 것이다.
대홍수로 인하여 물은 탁해지고 바닷물의 염도에는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민감한 해양 생물(예: 산호)의 생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부분의 산호는 얕은 물에서 발견되며 육지에서 흘러나온 것들로 생긴 혼탁함은 그들을 태양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차단할 것이다.
비가 내린 뒤의 침니(silt)는 산호초를 덮을 것이고 산호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호에서 칼슘이 축적되는 비율은 잘 알려져 있으며 고도로 성숙된 산호초(오스트레일리아의 대보초 the great barrier와 같은)의 두께를 관찰해보면 그것이 수백만년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질병들이 살아남았을까?
많은 질병은 사람 이외의 숙주가 없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세균들중 많은 것은 인체 내에서만 생존할 수 있고 절지동물을 통해서 잠시 살아있는다.
이런 것들은 티푸스, 홍역, 소아마비, 임질, 매독등이다.
이런 병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주안의 8명에 감염되어야만 한다.

방주안의 다른 동물들은 역시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동물들중 특이한 종에게서만 일어나는 병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주적이지 않은 질병들도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숙주-특이한 질병들중 숙주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숙주의 면역작용으로 제거되고 만다.(이런 것은 HIV(AIDS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말라리아(면역계에서 숨어 버릴 수 있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예를들어 홍역은 25만명 이하의 집단에서는 몇주를 넘기지 못한다.( Keeling & Grenfell, 1997)왜냐하면 더 이상 저항성이 없는 숙주가 없어지기 때문이다.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은 250만명에 비하면 턱없이 적으므로 이러한 질병은 홍수 기간중에 사라졌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질병은 다양한 종에 감염될 수 있고 이러한 병은 노아의 방주에서 역병을 일으키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찾아냈을 것이다. 예를들어 조류 바이러스들은 방주안의 새들에게 빠르게 전염되었을 것이다. 다른 역병들이 포유류와 파충류에게 빠르게 전염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질병이 병원성을 가지겠지만 만약 가능한 모든 숙주가 감염되서 죽거나 혹은 살아남았어도 그 병 자체는 사라질 것이다.

짧은 생애를 사는 종들은 어떻게 생존했나?
mayfly(강날도래류) 성충은 방주에서 며칠 사이에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하루살이의 유충들은 신선하고 흐르는 얕은 물을 필요로 한다.
다른 많은 곤충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어떻게 황폐화된 서식지에서 많은 종들이 살아 남았을까?
홍수는 대부분의 종들이 생존에 필요로 하는 식량과 서식처를 파괴했을 것이다.

육식동물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많은 종류의 방주속의 육식류들은 어떻게 그들이 먹을 종이 단지 한 쌍만 남은 상황에서 살아남았을까?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있는 육식동물은 더 많은 수의 피라미드의 아랫쪽에 위치한 동물들을 필요로 하고 그 동물들은 다시 더 많은 수의 먹이 동물을 필요로 하고 .... 이런 일이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기초생산자(식물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만약 육식동물이 살아남았다면 그들의 먹이가 되는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하여 인구에 영향을 주는 무작위한 영향력하에서 많은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
20개체 이하의 고립된 개체군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수단이 있더라도 대개 멸종하게 된다.

더욱이 아래 구절은 더욱 가관이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장 20절]

홍수가 끝난뒤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닌가!


8) 종들의 분포와 다양성
어떻게 동물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도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코알라는 아라랏 산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북금곰은 북극으로, 등등 돌아갔을까?
그들이 살기위해 필요로 하는 환경은 두 지점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많은 유일한 종들이 멀리 떨어진 섬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동물들이 아라랏 산에서 이동해 갈 때 생태학적인 상호간의 의존성 (interdependencies)이 보존되었을까?
유카(yucca, 실난초)와 유카나방이 어떻게 같이 대서양을 건너갔을까?
수천년전에는 자이언트 세콰이어 숲이 아라라드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져 있어서 고유 나무껍질과 cone beetle이 같이 이주했을까?

왜 많은 동물들이 제한된 지역에서만 발견될까?
어째서 그 많은 유대류는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살까?
왜 인도네시아에는 월러비(wallaby : 소형,중형의 캥거루)가 하나도 없을까?
왜 레뮤어 (여우원숭이)는 마다가스카에서만 살고 있을까?
그 외 여러 가지 종류의 동.식물에도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대부분의 종들이 근친교배에 따른 열화현상을 극복했을까?
대부분의 종에서는 해로운 열성 유전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사람은 대개 3-4개의 해로운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
이들이 근친 교배되었을 경우에는 자손들은 이런 열성 유전자를 두 개 가진 종이 될 수 있어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들어 이런 것은 치타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길들여 키우는 경우 열성이 나타나는데 이 경우 80%가 형태학적 이상을 보인다. [O'Brien et al, 1987]
오늘날 근친혼을 거부하는 것은 도덕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우생학적으로도 합당한 처사이다.
어떻게 여러종류의 종들이 단지 한쌍에서 이러한 열화현상에서 살아남고 번창할 수 있었을까?

9) 역사적인 면
홍수때 존재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록에는 왜 홍수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까?
성경 연대(I Kings 6:1, Gal 3:17, 및 창세기에 나온 여러 세대의 길이로 계산한)로 보면 홍수는 솔로몬이 첫번째 성전을 짓기시작한 것보다 1300년전에 일어났다.
우리는 근동(near East)의 문학에서 나오는 기록들로부터 근동의 역사, 특히 이집트의 역사의 믿을 만한 연대기를 구축할 수 있다.
이들 기록은 수목의 연대나 탄소-14와 같은 연대 측정법과는 독립적이지만 이들 방법으로 지지되고 있다.
첫번째 성전의 건물은 작은 오차로 B.C 950년 부근의 것이며 따라서 홍수는 B.C. 2250년에 일어난 것이 된다.
불행하게도 이집트인들은 B.C. 2250년 훨씬 이전부터 기록을 남겨왔다 (예컨대 대피라미드는 성경에서 말하는 홍수의 연대보다 300년 전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이다.)
이집트의 글에는 B.C 2250년 경 전지구적인 홍수의 기록이 없다.

어떻게 해서 인류의 인구는 그렇게도 신속하게 재건되었을까?
매 25년마다 인구가 배증했다고 해도(매우 너그러운 추정이지만) 110년 -150년후 바벨탑이 세워졌을 때(창세기 10장 25절, 11장 10절-19절)에 세계에는 겨우 128명의 사람만이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톤헨지와 피라미드를 건축하고, 수메르와 인더스 계곡 문명을 세우며 아메리카 대륙을 채웠어야 할 사람은 아주 적었을 것이다.

왜 다른 홍수신화는 창세기의 이야기와 서로 다른가?
홍수 이야기는 제4장에서 언급했지만 전세계적으로 매우 흔하다.
그리고 그것이 공통된 원천에서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거의 비슷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신화들은 매우 다양성을 보여준다. [Bailey, 1989, pp. 5-10; Isaak, 1997]
즉, 수메르에서 파생되고, 경교의 영향을 받은 홍수설화는 비슷하지만, 다른설화들은 상당히 차이를 나타낸다.
예를들면 사람들이 높은 지대나 혹은 나무위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나 배를 타거나 땟목을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어떠한 홍수 설화도 다른 생명체를 다시 파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10) 논리적, 철학적, 신학적 요점들
홍수모델은 성경과 일치하는가?
창조주의자들이 대홍수에 대해서 쓰면서 그들은 그들이 지지해야할 성경과 오히려 반대가 되는 글을 쓸 때가 있다.
예를들면 Whitcomb & Morris [1961, p. 69n]은 많은 수의 육상동물들이 홍수때문에 멸종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창세기는 노아는 모든 종류의 육상동물들의 대표적인 샘플을 방주에 실을 것을 명령받았고 노아는 명령받은대로 행했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oodmorappe [1996, p. 3] 은 무척추동물(즉 성경에서 말하는 땅위를 기는 모든 길짐승들)들은 남겨두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왜 우리는 열렬한지지자들이 그들이 불편하면 버리는 그런 이야기에 신뢰를해야 하는가?

문헌의 텍스트가 자기 모순을 보일때 어떤 해석이 적절할까? 창세기 6:20과 7:14-15는 정결한 짐승이 둘씩 있었다 하고 창세기 7:2-3,5는 일곱이라고 한다.

문자적인 해석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아는 어떻게 각 종류의 수컷과 암컷을 모을 수 있었을까[Gen. 7:15-16]? 어떤 종은 무성생식이고 어떤 것은 처녀생식 (단위생식)이어서 암컷만 있고 또 어떤 종은 (예: 지렁이) 양성이다.
또 개미나 흰개미 같이 사회성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는 그들 둥지 전체가 있어야 하는 경우는 어떤가 ?

홍수말고 다른 이야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홍수를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두에서 언급해 놓았듯이 평평하고 정지해 있는 지구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상 홍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예수는 우화를 많이 사용했다.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면 왜 않되는가?

홍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가?
Davis Young은 현역 지질학자이면서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창조론 및 홍수 지질학을 유지하는 것은 믿지 않는 과학자에게는 호교론(변증론 : 기독교를 변호하는)으로 쓸모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비록 과학적 훈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자들의 말에 이끌린다고 해도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믿는 기독교는 관심을 둘 만한 가치가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이런 점에서 현대의 창조과학은 호교론으로나 복음적으로 헛된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복음에 장애가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우려되는 위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신의 진실을 지키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이 틀렸다고 느끼게 되는 점이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젊은 지구, 홍수 지질학 창조론을 방어하는 것은 정직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때이다.
이는 신이 주신 사실에 일치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창조론을 그 해악이 실제로 나타나기 전에 버려야 할 것이다.
다른 기독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과학은 목의 가시와 같이 엄청난 아픔이다. 이들은 정직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고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은 믿음의 신뢰성에 알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상처를 주고 있다.'
홍수 이야기는 전능한 신을 말하고 있는가?
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왜 멸하고자 한 것을 직접 죽이지 않았을까?
왜 셀수 없이 많은 기적을 더 필요로 하는 우회하는 방법에 의존했을까?
홍수는 사악한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설령 이 모든 문제들로도 홍수 모델이 수수께끼처럼 되 버리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가 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설명할려고 시도하는 것들은 전통적인 지질학과 생물학으로 더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이미 설명되고 있는 바이며 홍수 모델은 많은 다른 문제들을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설명할 수조차 없다. 홍수 지질학이 어디 쓸모 있는가?"

11) 날조된 방주의 유적
노아의 방주를 아라랏산에서 발견했다는 보고는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아라랏산의 위치는 과연 어느곳일까?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는 아라랏은 원래 우라르투(Urartu. '아라라트'라고도 불린다)왕국의 히브리어식 표기이다.
구약성서에서 모두 4회 등장하는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왕국을 의미했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는 '하레이 아라랏', 즉 '아라랏 산지'로 기록된 만큼 넓은 의미의 고원지대를 일컫는다.
또, 예레미아서(51:27∼28)에서는 '아라랏 왕국'으로 기록되어 있고, 열왕기하(19:37)와 이사야서(37:37∼38)에서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을 암살한 자들이 쿠데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라랏 땅', 즉 우라르투 지방으로 망명했다고 한다.(우라르투는 앗시리아의 적대세력이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아라랏은 특정한 산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고원지대에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 기원전 13세기 앗시리아의 샬마네세르 1세의 기록에서 '우루아트리(Uruatri)'로 처음으로 등장한 도시국가의 지역이름이다.
우라르투왕국은 기원전 900년경부터 앗시리아의 끊임없는 침략을 피해 서쪽의 반(Van)호수 근처로 중심지를 옮겼고, 기원전 830년에 사르두리(Sarduri '사르투리스'라고도 불린다)1세는 도시국가들을 통합해 천연적인 바위요새인 반 칼레시를 수도로 삼고 투슈파로 명명했다. 투슈파는 반 호수의 동쪽 평원에 주위보다 100여m나 높고 길이가 1.8㎞에 달하는 천연적인 바위요새이며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채는 대부분 서기 1000년경 셀주크 시대부터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 왕국도 기원전 714년 앗시리아의 사르곤2세가 우라르투의 중심부를 점령한뒤, BC 6세기 초에 메디아왕국에 종속되었다가, BC 585년 아케메네스왕조 캄비세스 1세에게 멸망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르메니아공화국과 터키 동부를 차지했던 이 넓은 고원지역에서 어떤산이 성경속의 아라랏산일까?
이 지역에 방주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바벨론 사람이었다.
기원전 3세기 바벨론의 역사가 베로소스는 지우수드라의 방주가 당시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고르디예 산에 있다고 증언했다.
그가 언급한 고르디예 산은 티그리스 강과 대 자브 강 사이에 위치한 해발 2114m 높이의 주디 산이며, 이 지역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노아의 산으로 신성시됐다.
해마다 9월14일 이 지역의 유대교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들은 모두 산 정상에 모여서 노아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드린 첫 제사를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는데 이 전통은 서기 13세기까지 지속됐다.

주디산과 함께 지목받는 또 하나의 산은 아르산(터키어로 '아르 다으')이다.
베로소스를 인용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노아의 방주가 아르메니아에 있다고 기록했다.
AD 5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이 아락세스 지역에서 독립한 후 이 왕국의 최고봉 아르 산이 최종적으로 아라랏 산으로 확정되게 됐다. 이 시기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된 시기와 일치한다.
오늘날 터키의 '아르 산'은 우라르투 영토인 반, 세반, 우르미야 등 3개의 호수를 연결하는 삼각지역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아라랏산이라는 것은 그 위치부터가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주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끊이질 않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인가?
우선 가장 유명한 일화를 살펴보자면, 1955년 페르낭 나바라(F. Navarra)라는 프랑스 탐험가가 터키의 최고봉 해발 5137m 높이의 아라랏 산에 올라가 해발 4000m 지점의 얼음 구덩이에서 검은 역청이 칠해진 1.5m 길이의 나뭇조각을 가져왔다.
이 나무의 샘플은 정확한 연대측정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여러 연구소로 보내졌는데, 측정 결과 한 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기 7∼8세기의 것으로 판정했다. 단 한 군데 과학적인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임업연구소만 나무의 색깔과 밀도를 기준으로 5000년전의 것으로 판명했다. 참나무로 밝혀진 이 샘플의 밀도는 1.1로 밝혀졌는데, 평균적으로 참나무는 살아있을 당시는 0.8 정도이므로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결과이다.
결국 탄소동위원소법에 의하면 7~8세기의 것인데, 그 방법을 실시하지 않고 참나무의 평균밀도만을 조사한 연구소만이 기원전 5000년경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더욱이 성경속의 방주를 만든 나무는 '전나무'이다.(개역한글판에는 '잣나무'인데, 나무의 분류에서 둘다 '소나무속'에 속하는것이다)
반면에 참나무는 쌍떡잎식물로 '참나무속'에 속한다. 성경에 나오는 방주와는 틀린 재질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바라는 1974년 "내가 손으로 만진 노아의 방주"라는 책을 펴내게 되었다.

그러나 방주를 목격했다는 주장은 여기에서 그치질 않는다.
필자가 창조과학 사이트에가서 둘러보니 방주목격담은 수도없이 많다.

"1856년에는 영국의 무신론 과학자 세명이 방주를 발견하고 기독교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하여 방주에 불을 질렀고, 자신들의 길을 안내하였던 안식교인들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못하도록 위협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방주는 만년설과 얼음강에 파묻혀 있고, 오랜 기간 보존된 나무가 석화(돌처럼 딱딱해지는 현상)되어 불에 타지않고 보존되었다."

필자가 이 이야기에 가장 황당해했다.
반기독교인이 기독교가 확산되는걸 막기위해 불을 질렀다는 이 일화는, 창조주의자 그들 스스로가 파렴치한 자료날조를 밥먹듯이 하는 거짓말쟁이라는것을 스스로 증언하는 듯하다.
방주를 발견했다면 그것자체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것이 분명한데 왜 불을 지르는가? (게다가 그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아 날조자료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제정러시아와 소련, 미국의 정찰 비행단이 방주를 발견했다고 하거나 수많은 탐헌가들이 방주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창조주의자들은 ERTS(지구 자원 탐사 기술 위성)에서 방주를 발견했으며, 방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군사 사진 또는 자료가 적어도 8종 정도가 있으나 아직 기밀로 분류되어 세상에 발표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주장에 필자는 창조주의자들 그들 스스로가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군사위성이나 자원탐사위성등에서 방주의 위치를 발견했다면 어째서 그것을 발견하지 않는가? 위성에서 관측했다면 그 위치는 아주 정확할 것이다.
군사위성으로 지하에 자리잡은 비밀 핵기지까지 추적하고, 수km에 달하는 두꺼운 빙하에 파뭍힌 남극대륙의 해안선까지 정확하게 탐사하지 않는가?
그런데 노아의 방주가 군사기밀이라서 세상에 발표되지 않는다는 주장 또한 우숩다.
만약에 실제로 방주가 있다면 그것은 고고학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유물임이 분명하다.
군사위성으로 정확하게 위치까지 알고 있다면서 발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군사기밀인가?
게다가 제정러시아,소련,미국의 비행단이 비행중에 방주를 발견했다는 점을 보면 방주는 빙하에 파뭍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즉 굳이 인공위성으로 방주를 발견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창조주의자 그들 스스로가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공위성으로 방주의 위치까지 알면서 군사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창조주의자들이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이고 사악한 날조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일임을 어찌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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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9, 2006

다빈치코드(Da Vinci code)의 거짓됨과 기만성에 대하여

글을 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과 또한 좋은 또는 옳은 것이라는 것과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인기몰이 사상(just as times books)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같아서 그냥 지나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씀에 있어서 몇가지 동기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에 당위성을 느끼게 됨에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거짓 사상이 마냥 그러한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고 기만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답변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일반 상식적인 개념에서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특정 집단 특히 우리 기독교에 대하여서 왜곡시키고 피해를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기만시키고 있다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흐려놓는 가운데서 글쓰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함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이 그 글쓴 자를 비롯한 오도되어진 편견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좀더 자유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언을 더한다면 '다빈치 코드'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개개의 문구와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계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총체적으로 그것이 부정되었음에 대한 것을 그 합리성의 정당함이 부정되어 거짓이라고 함의 실체를 지적함으로 글을 한정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에 즈음해서

1, 기독교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사실이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빈치코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함에 있어서 잘못이해하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교회의 교육과 잘못된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과 같이 생각하거나 임의적인 기득권의 사수적 개념으로 일관하겠다는 맹목적인 어떤 피해의식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는 것은 다빈치 코드라는 입장과 그것에 관련된 사상들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본다고 해도 거짓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빈치 코드를 말하는 서양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합리성의 무비판적인 표현이 가능한 '언론 플레이'들이 오히려 책망을 받아야하고 또한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럽 대륙의 합리성의 인식과 합리성이라고 하는것은 실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은 가운데서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방법 즉 'How'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실재의 여부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따라서 합리성이라고 함에서 실재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고없이, 합리성에 비로소 따르는 실존에 대한 일방적 판단에 따른 사실성의 개연성으로, 그것도 실재도 아닌 것을 말한다는 것과 그대로 받아들여서 상업화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더욱 특정 집단으로써 우리 기독교에 대한 왜곡을 의도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특정 집단(우리 기독교의 입장)에 피해를 주는 것을 상업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법적인 소송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빈치코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부정적이라는 임의적 생각으로 자신들의 입장이 상대적인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하여서 열려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수 있음을 인하여서(클릭 본문참조하세요) 그 특정 집단의 편견이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절대의 재가가 있는 절대의 보편성이 있는 증거적 사실이 성립되어지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판단의 범주에서 비로소 기독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측면을 강조하여서 그들의 입장을 추구하려고 하겠지만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한 견해라고 기독교측을 편협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자의 보편성의 부여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최소한 그 개연성을 인정할 때에는 그 자체적 정당함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존적 절대 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결국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또한 상식적인 결론적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도 핑계못하는 복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2,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하여서

어떤 이들은 문학이라고 하는 것 '글쓰기'Writings'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고 허구를 다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의식에 국한해서 쓰일 필요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한정되어진다는 점에서 제한되어진 범위를 가지는 것으로써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윤리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각주1)

그런데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차연이라고 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니체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성립되어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자유라고 하는 것을 방종으로 이해함의 당위성을 말하는 그런 안티적 자유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즉 규정되어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과 그 규정되어짐의 실존이 없다는 것은 항상 동일한 사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함의 자유라고 함에 있어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도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한되어진 윤리적 사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택스트를 해체함에 대한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상대적인 택스트라고 비로소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인식으로써 임의적 메타해석적 인식의 증식을 주장으로 자신들의 안티적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표현하였음에 대한 것을 상대적으로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에 그 자체적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함으로써, 그 택스트는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의 사실적 판단이라는 범주적 판단을 비로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영감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하게 절대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고 내셨다는 점에서, 비로소 상대적인 범주만으로써의 해석적 임의성은 그 가능성의 정당함을 따라 해체적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대한 강요적 인식을 구축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임의적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개연적 사실로써 재구성된 것으로써 총체적 부정되어진 상대적 정당성으로써 자존적 절대의 보편과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사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신과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거짓으로써의 것밖에는 실존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학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발생적 학문의 기원과 상관성에서 볼 때에 그 상대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의 판단 범위설정에서 한정된 경계선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윤리적 가치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상대적 보편의 참된 사실과 타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판단의 범위에 있더라도 상대적인 개별적 특수성도 감안해야 함이 보편의식에 어울리는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판단을 내림도 허용되어질 수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개별적 특수성은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그 가치와 사실의 취급에 타당성을 말할 수 있는 한정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자유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계시하심으로써 자존의 절대의 보편성이 부여된다면 비록 형태적인 측면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동일한 상대적인 범주에서의 판단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며,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 상식적으로도 다빈치코드가 상대적인 안티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가지고 비로소 상대적 해석적 당위성을 말하고 공포하는 매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며 상대적일 뿐이라는 불가지론적인 개념에서의 타당성에 의한 기만적인 의지의 표현밖에 안되는 것임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다빈치 코드거짓기만인 것입니다.

특정 집단으로서의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성립되어지지 않는 사실로써의 임의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피해를 입혔다면 사회적인 법적 소송도 가능하고 또한 사실심리에서도 사실이성립되지 않는 안티적 다빈치코드의 반론의 사실들도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일반상식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의 사상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영광을 비로소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영광을 가리려고 한 미수적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사실로써도 판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문학계에 '빅뱅'(big-bang)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폭'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물러나 빅뱅의 의미가 처음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을 수행적 모순에 따라서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 파편들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때에 그것이 성립이 되어질 수 있지, 이 다빈치 코드와 그 아류들은 그 사실의 실존을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실로 보게 되어지는 '자폭'이 어울리는 것임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일반 사람들 앞에서 그 행한 것에 대한 법적인 소송적 입장에서 대응함에 동의하면서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에서 그 존재의 고민과 변명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주의 은혜가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며 글을 맺습니다.





각주1) 문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이해한다면 문학의 독립적 표현과 상관성이해에서 자유와 보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개념에서의 글쓰기와 해체라는 것의 보편성은 일반적으로 데리다를 비롯한 자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수 있는데 이들의 글쓰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문학의 자유와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상주의라는 반론이 있다면, 그 '사실우상'이라고 함의 인식적 판단이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생각할 때에 그런 규정은 의미가 없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데리다의 글쓰기와 같은 어떤 문맥적인 규정적 개념의 택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을 허락되어질 수 있는 허구와 관련되어서 우리의 삶에 유익할 수 있는 측면을 유도해내는 문학적 입장의 가치과 자유와 보편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되어져야 하고 그것은 윤리적 판단을 받음에 전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문학이라고 함과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 생성적 과정을 볼 때에 상대적인 보편성에 있어서도 한정되어진 보편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은 니체의 사상을 해석하는 계보 가운데서 파생되어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독립성을 말한다고 하여도 비로소 절대적 분립의 독립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즉 상대라는 범주에서는 절대라는 것이 비로소 개념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임의적 허용이라고 하는 것과 절대자의 자기 계시적 나타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상대적 절대라는 개념이 진정한 절대의 실재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후자의 입장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측면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 비교되어질 수도 있고 한정되어질 수도 있고 그 제한적 범위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쉽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연수의 집합은 유리수의 집합에 포함되어지고 그 유리수는 실수에 포함되어진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두 무한집합이면서도 부분집합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연산이라고 하는 것도 제한되어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합론을 말하는 것은 이미 기호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합리적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과 문학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의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형식논리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과 순서쌍에 따른 경우에 따라 변증법적인 문학적 논리를 펼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학의 자유를 위한 변명으로써의 논리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같이 임의적 자유(freedom)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면서도 자유(liberties)를 말하는 것으로 제한적 윤리와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에 따른 학문의 범주설정이 사실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러한 상대적인 보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의 보편이라고 함을 의식해야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 범주의 설정이해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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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4월 15, 2006

합리성의 당위성에 대하여서

설명: 반 기독교연합회, 반기련에 올렸던 글입니다. 글을 쓸 수 없도록 해놓고 반론도 하지 못한 가운데서 근거없이 비난도 하고 있기에 어떤 글을 올렸는지에 대한 표현이 있어야 할 것같아서 저의 글을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자주 찾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안티안의 글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러한 글이 저의 언급과 비교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의 오류와 판단에 유익을 위해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는 무뇌라고 하는 말을 두려워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비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해하지 못한 비판의 글이 있어서.. 저의 입장에서는 분명함을 말하고자 하고 위하는 측면에서는 이성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통해 안티안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가려주기 위함입니다.

뭐.. 안티안들의 보편성이 이미 왜곡되어지고 편협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너무 맹목적이고 피상적이라는 점에 부끄러움을 그래도 감추어주고 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이 회원으로서 기본적인 입장이 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안티안의 싸이 페이퍼에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공자나 석가들이 먼저 온 자들로서 예수님을 쫄병으로 묘사하는 그 선취적 개념의 권위로 비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마디 해두었는데.. 반기련에서 한마디 해두는 것이 좀더 분명하게 말하게 되는 것일 수 있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자신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심에 있어서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에 대한 비판의 정당함을 스스로 그리고 절대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합목적성의 시비와 그 이하 합리성의파편적당위성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합리성의 실존이 항상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상대적인 판단과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언급을 하면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그 판단이라고 하는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여서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웃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이 다른 성인들의 나타남 뒤에 왔다는 것으로 그 권위적 실존의 정당함을 부인하고 조소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합리성의 인식의 계기인 시간의 개념에서 비로소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신학과 철학에서 철학의 개조와 변형을 말하고 있고 또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여서 전제되어질 수 있는 필요의 모순은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자에게 요구되어질 수 있는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펠의 윤리적 담론에서 말하고 있는 수행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정당함의 여지를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의 개념에 대하여서는 당위성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권위.. 옛 가톨릭에서는 터툴리안을 비롯한 자들의 '취득시효'라는 개념에서 먼저 되어짐에 대한 것으로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수행적 모순이라는 것의 당위성에서 납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러한 노력을 하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시간의 개념의 판단에서 비로소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의 사실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시간의 실재적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 시간관을 가지고 상대적인 일반 역사의 시간관을 비로소 생각해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돌을 던지는 자의 모습은 인식의 모자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시간관과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시간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실존이라고 함을 재고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의 실존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인식의 계시로서 시간의 개념이 없는 자의 어리석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시간의 실존과 개념이라고 하는 것에 사실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가운데서 비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러한 역사관으로 예수님의 실존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더 분명히 말하게 되는 것은 삼위 일체로서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의 자기 계시라는 점에서 그 실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적으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판함에 모든 합목적성이 재가를 받지 않은 한 그 정당한 실존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심에 대한 것은 그냥 맹목적인 전제가 아니라 그 역사적인 순서적 실존적 권위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계시적 증거임을 말해두겠습니다.

인식의 계기로써의 시간의 개념에 대한 철학과 신학에서의 많은 노력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의 합리성의 아름다움은 있으나 그 실존적 정당함은 여전히 부재하며 그것을 위한 상대적인 합의에 전전긍긍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둡니다. 그것은 세상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이 그 실존을 말하지 못해서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고 허사의 경영의 아름다움으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현실이라고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실존적 정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 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지혜의 근본이신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글에 대한 상황설명:

안티기독교에서 예수님을 비하하는 만화가 있었는데, 그것의 내용인 즉,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임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공자나 석가가 먼저 왔다는 것을 통해서 실존을 비교하고 있고 비교 폄하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군대 신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역사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실존적 비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오심의 모습은 있으나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역사이전의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역사라는 시간의 순서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인식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비판을 낳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글입니다. 그러한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반 기독교 연합회 회원으로서 그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비판은 없고 비난하고 있고 글을 쓰는 것을 제한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서 저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같아.. 이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글의 동향과 저의 입장 :

반기련에서 비판의 내용은 이 글에 대한 직접적인 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저의 요구는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증명하라는 그 말이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증명요구를 하더군요 그리고 하나님의 부존재에 대한 증명을 하라고 하니까.. 그것에 표현을 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증명이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그들의 요구와 답변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그들의 기독교 비판의 증명의 사실들과 그들의 모든 합리성과 방향은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참고:
반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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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13, 2006

개척교회와 '가정교회'에 대하여

종교개혁과 그 시기 이전에도 어떤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맹목주의적 개념의 신비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임의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선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잘못된 길을 걷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더 구별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 '개척교회'와 '가정교회'라는 것이 그 한 주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주관적인 생각에서 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사실로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개혁신앙인 것과 같이 안티적 개념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단순함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경향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이 소위 요즘에 말하고 있는 '가정교회'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급하게 가톨릭의 교회?질서에서 신교의 교회질서를 말함이 그러한 것들을 부축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독교 교회 질서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질서에 대한 실제이해의 부족과 왜곡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해두겠습니다.(각주1)

교회 개척을 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부족을 인하여 비로소 가정교회라는 명목의 교회출석을 대신하고자 하는 모습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은 가정교회의 사실적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사실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형태로서의 가정교회는 개척교회의 실존적 사실로 받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라고 하면 목이 부러질 엘리의 섬기는 구약교회의 모습의 성전에서도 사무엘은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각주3)

그래서 임의적 기존교회의 질서를 배척하는 가운데서의 가정교회를 말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결여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릴 수 있지만 비로소 교회로써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으로써 가정교회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진정 교회 개혁과 개척의 뜻하심을 마음에 둔다면 특정 교회의 질서를 믿음으로 선택하고 그곳에서 사무엘과 같이 훈련을 받고 또 그러한 교단과 교회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가운데서 전문적인 말씀의 증거자라는 객관적인 직분을 얻어서 또 교단적으로 교회의 개척설립을 허락받든지 적어도 개척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그 예배처소를 구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교회의 형태이든 아니면 기존교회의 규모를 갖추든 그것은 믿음에 따라 주신 은혜에 따라 주 앞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론적에 즈음해서..

교회 개척이라는 명분이 너무 임의적으로 행하여지고 안티적 기존교회의 질서의 배척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행하여지는 무질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자신의 믿음의 분량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여도 진정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함의 모습과 중심을 갖추고 있으면 여러가지 판단되어진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런 잘못된 것의 사실성을 우리가 비로소 판단함 보다도 기도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고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이 최소한 기도함과 힘씀이 바르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교회의 개척을 한 가운데있고 교회개척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작은 모습이라고 하여도 세상 구석구석에 주의 예배처를 구별하여 주께 경배드리도록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적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교회 개척을 말한다고 하면 그 분별없음에 대한 책망은 주께서 판단하신 바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의 세우신 교회의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교회 개척을 하셔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뜻하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실재에 대한 개념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라고 함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존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사실논쟁이었던 것이 종교개혁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만 안티적 개념이라는 상대적 배척이라고 함과 분리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종교개혁을 말한다면 그 종교개혁에 대한 인식과 그의 비판관이 옳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주 2) 상황적 특수성이 있는 선교지에서의 상황을 고려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신뢰할만한 교단적 입장을 찾지 못하거나 없다고 할 때에는 다른 신뢰할 수 있는 교단적 질서를 찾아서 행함이 옳은 것이고 상황적으로 교회 개척을 가정교회의 형태로 미리 시작하더라도 할수 있는데로 교회의 기존적 질서를 존중하고 그 질서적 정당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함이 옳은 것입니다. 즉 상황적 개념의 여건이라고 함이 기존질서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당위성에 비로소 정당한 것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각주 3) 엘리의 중심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하는 그러한 중심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대충의 절충적개념 상식보편적 개념으로 일관할 때에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그 때가 되기전까지의 모습은 그래도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서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삼상 3장,4장)

일요일, 3월 05, 2006

세계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세계관을 말하게 될때에 마음에 두게 되는 신학자는 화란자유대학을 세웠던 아브라함 카이퍼와 기독교철학이라고 함을 말하고자 했던 도이베르트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세계관을 지향함에 있어서 그 합리성의 깊이와 정교함은 인정하지만 그 앞서는 학문적 합목적성의 방향과 실제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그러면서도 링크를 시키는 것은 구별하여 선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참고적인 면과 지금에 있어서는 최선적 입장의 선을 말할 수 있는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로 연결시킵니다.

월요일, 1월 23, 2006

누가 '실제상황'을 말하는가..

요즘에 언어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그러한 자들이 있는 것같아서 씁씁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라는 말..

비록 철학적인 개념으로 규정되어지는 말로서 차용되어진 언어 '실제'라는 말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의 거룩함이나 인위적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함을 말하게 되는 당위성에 따라 차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말하기 전에 그만한 실재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실재론에 대한 부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면서 그것으로부터 규정되어질만한 '실제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상식적으로도 당위성을 말할 수 없는 몰상식한 가치평가절하되어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씁씁하게 하고 답답함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채용되어질 수 있는 언어로서 실제라는 것은 사태라는 것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언어입니다.


'사태'라고 하는 것은 어떤 되어지는 일들의 형태와 그것의 인식되어지는 현상적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실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사상가들의 사상들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불가지론'이라는 사상을 피해가는 자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의 객관적인 증거를 하나 들어보라고 하면 그것은 500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라는 타임즈지에서 언급한 영국의 '버틀란트 러셀' 철학자는 공공연한 입장에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대부터 소위 '덕'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상대적 유익이라고 하는 것의 타당성을 통해서 학문의 정체성과 사태파악과 사실을 말하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실의 규정적 정당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진정한 사태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 실제를 규정하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실제상황'이라고 말하고 있고 있는 천지가 개벽한다는 사람들의 입장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유해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글을 쓰게 됩니다.

철학에서의 언어의 정확한 사용을 추구하였던 비트겐슈타인과 언어놀이를 말하는 니체의 노선에 있는 데리다의 문학적 기교가 비교되어지고 있고 그러한 것이 영미철학 아니 영미 문학가를 말하고 있는 즈음에 영미신학과 철학과 그것에 대한 인위적 비판과 임의적 차원에서 말놀이 하는 식의 임의적 사실규정과 실제를 말해서 자기 배를 체우는 자들의 모습.. 사람을 미혹하고 배를 채우는 모습들이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받으며 증거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진정한 실제상황을 살아가면서 그것에 대하여서는 필요성에 대한 당위성 비로소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가운데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고 추구할뿐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답답함의 일막 일장을 기술해봅니다.


마지막 장 마지막 장은 아마도 교회가 진정한 실제와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에 대한 글들로 언젠가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 설 때에 온전히 쓰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며 또한 그 일막일장의 답답함은 여기까지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