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그 시기 이전에도 어떤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맹목주의적 개념의 신비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임의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선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잘못된 길을 걷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더 구별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 '개척교회'와 '가정교회'라는 것이 그 한 주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주관적인 생각에서 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사실로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개혁신앙인 것과 같이 안티적 개념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단순함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경향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이 소위 요즘에 말하고 있는 '가정교회'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급하게 가톨릭의 교회?질서에서 신교의 교회질서를 말함이 그러한 것들을 부축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독교 교회 질서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질서에 대한 실제이해의 부족과 왜곡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해두겠습니다.(각주1)
교회 개척을 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부족을 인하여 비로소 가정교회라는 명목의 교회출석을 대신하고자 하는 모습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은 가정교회의 사실적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사실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형태로서의 가정교회는 개척교회의 실존적 사실로 받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라고 하면 목이 부러질 엘리의 섬기는 구약교회의 모습의 성전에서도 사무엘은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각주3)
그래서 임의적 기존교회의 질서를 배척하는 가운데서의 가정교회를 말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결여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릴 수 있지만 비로소 교회로써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으로써 가정교회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진정 교회 개혁과 개척의 뜻하심을 마음에 둔다면 특정 교회의 질서를 믿음으로 선택하고 그곳에서 사무엘과 같이 훈련을 받고 또 그러한 교단과 교회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가운데서 전문적인 말씀의 증거자라는 객관적인 직분을 얻어서 또 교단적으로 교회의 개척설립을 허락받든지 적어도 개척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그 예배처소를 구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교회의 형태이든 아니면 기존교회의 규모를 갖추든 그것은 믿음에 따라 주신 은혜에 따라 주 앞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론적에 즈음해서..
교회 개척이라는 명분이 너무 임의적으로 행하여지고 안티적 기존교회의 질서의 배척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행하여지는 무질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자신의 믿음의 분량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여도 진정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함의 모습과 중심을 갖추고 있으면 여러가지 판단되어진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런 잘못된 것의 사실성을 우리가 비로소 판단함 보다도 기도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고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이 최소한 기도함과 힘씀이 바르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교회의 개척을 한 가운데있고 교회개척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작은 모습이라고 하여도 세상 구석구석에 주의 예배처를 구별하여 주께 경배드리도록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적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교회 개척을 말한다고 하면 그 분별없음에 대한 책망은 주께서 판단하신 바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의 세우신 교회의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교회 개척을 하셔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뜻하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실재에 대한 개념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라고 함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존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사실논쟁이었던 것이 종교개혁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만 안티적 개념이라는 상대적 배척이라고 함과 분리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종교개혁을 말한다면 그 종교개혁에 대한 인식과 그의 비판관이 옳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주 2) 상황적 특수성이 있는 선교지에서의 상황을 고려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신뢰할만한 교단적 입장을 찾지 못하거나 없다고 할 때에는 다른 신뢰할 수 있는 교단적 질서를 찾아서 행함이 옳은 것이고 상황적으로 교회 개척을 가정교회의 형태로 미리 시작하더라도 할수 있는데로 교회의 기존적 질서를 존중하고 그 질서적 정당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함이 옳은 것입니다. 즉 상황적 개념의 여건이라고 함이 기존질서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당위성에 비로소 정당한 것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각주 3) 엘리의 중심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하는 그러한 중심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대충의 절충적개념 상식보편적 개념으로 일관할 때에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그 때가 되기전까지의 모습은 그래도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서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삼상 3장,4장)
좀더 구별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것이 '개척교회'와 '가정교회'라는 것이 그 한 주제가 되어질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주관적인 생각에서 교회의 질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사실로써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개혁신앙인 것과 같이 안티적 개념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단순함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경향이 많이 있고 그러한 것이 소위 요즘에 말하고 있는 '가정교회'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급하게 가톨릭의 교회?질서에서 신교의 교회질서를 말함이 그러한 것들을 부축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독교 교회 질서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교회질서에 대한 실제이해의 부족과 왜곡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해두겠습니다.(각주1)
교회 개척을 함에 있어서 그 형태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의 부족을 인하여 비로소 가정교회라는 명목의 교회출석을 대신하고자 하는 모습을 취한다면 그것은 옳은 가정교회의 사실적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사실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형태로서의 가정교회는 개척교회의 실존적 사실로 받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나타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라고 하면 목이 부러질 엘리의 섬기는 구약교회의 모습의 성전에서도 사무엘은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각주3)
그래서 임의적 기존교회의 질서를 배척하는 가운데서의 가정교회를 말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결여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드릴 수 있지만 비로소 교회로써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으로써 가정교회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진정 교회 개혁과 개척의 뜻하심을 마음에 둔다면 특정 교회의 질서를 믿음으로 선택하고 그곳에서 사무엘과 같이 훈련을 받고 또 그러한 교단과 교회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가운데서 전문적인 말씀의 증거자라는 객관적인 직분을 얻어서 또 교단적으로 교회의 개척설립을 허락받든지 적어도 개척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그 예배처소를 구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교회의 형태이든 아니면 기존교회의 규모를 갖추든 그것은 믿음에 따라 주신 은혜에 따라 주 앞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론적에 즈음해서..
교회 개척이라는 명분이 너무 임의적으로 행하여지고 안티적 기존교회의 질서의 배척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행하여지는 무질서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자신의 믿음의 분량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여도 진정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함의 모습과 중심을 갖추고 있으면 여러가지 판단되어진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런 잘못된 것의 사실성을 우리가 비로소 판단함 보다도 기도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고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이 최소한 기도함과 힘씀이 바르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교회의 개척을 한 가운데있고 교회개척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작은 모습이라고 하여도 세상 구석구석에 주의 예배처를 구별하여 주께 경배드리도록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적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교회 개척을 말한다고 하면 그 분별없음에 대한 책망은 주께서 판단하신 바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욱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의 세우신 교회의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교회 개척을 하셔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뜻하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실재에 대한 개념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질서라고 함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존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사실논쟁이었던 것이 종교개혁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만 안티적 개념이라는 상대적 배척이라고 함과 분리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종교개혁을 말한다면 그 종교개혁에 대한 인식과 그의 비판관이 옳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주 2) 상황적 특수성이 있는 선교지에서의 상황을 고려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신뢰할만한 교단적 입장을 찾지 못하거나 없다고 할 때에는 다른 신뢰할 수 있는 교단적 질서를 찾아서 행함이 옳은 것이고 상황적으로 교회 개척을 가정교회의 형태로 미리 시작하더라도 할수 있는데로 교회의 기존적 질서를 존중하고 그 질서적 정당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함이 옳은 것입니다. 즉 상황적 개념의 여건이라고 함이 기존질서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당위성에 비로소 정당한 것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각주 3) 엘리의 중심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하는 그러한 중심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대충의 절충적개념 상식보편적 개념으로 일관할 때에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그 때가 되기전까지의 모습은 그래도 하나님의 일반적인 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서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삼상 3장,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