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2월 25, 2011

유명론 이해에 대하여

인식의 동향

작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명론적 인식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과 재고찰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환영한다.(각주1) 하지만 여러 관점들이라고 하는 것의 기반에 따른 다양한 언급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을 취하기 전에 합당한 납득 당위성을 재고하지 않고 맹목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이름에 대해 유명론적 이해에 대한 입장들


1,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영국과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입장을 굳히고 있는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재고를 한다고 할 때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입장과 같은 언어적 전회로서 접근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의 사상의 변화와 같은 맥락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재고는 합당함을 말할 수 없는 합리성의 기술밖에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란 표현과 하느님의 표현에 대해서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각주 2)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은 합목적적이라는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상대적인 표현과 기술적 자기계시를 하셨다고 해서 상대적 당위성의 판단하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상대적 자기계시의 형태를 취하심은 자존의 자기 절대 본래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 3)


2,진화론적 입장에서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라는 글을 쓴 존 티한의 입장은 진화론적 개념에서 즉 종교의 진화론적 개념에서 종교적 폭력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 진화라는 개념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진화에서 종교적 개념을 이야기 할 때에 자연신학과 같은 배경을 언급할 때에 자연(nature)의 개념이 인격화 되어지는 모습과 또한 선택적 개념이라는 것이 종교적 더 나아가서 신학적 선택과는 전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우생학적 선택적 개념과 종의 변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과 비교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도 진화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에 그 만들어진 신의 개념의 인식의 변화와 그를 위한 정당성을 상대적으로 세워나가기 위해 폭력적 정당함을 취해왔다는 이교적 개념을 말할 수도 있고 기독교적 개념도 유사하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할 수 있음과 정당함이 항상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수행적 모순으로 표기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 비교'라는 개념만으로 신의 이름을 말함에 대하여서 만들어진 신과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동일적 범주로서 인식하는 것은 근거지움이 임의성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종교적 폭력이라는 나열적 역사관의 기술보다는 신에 대한 인식의 납득 당위성을 재고한 다음에 이해의 규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사유의 순서가 될 수 있음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예상할 수 있는 입장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개념은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가운데서, 유명론과 상관없는 존재론으로서의 과정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범신론적 또는 범재신론적 개념의 존재자를 상정해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실재론 즉 하나님의 이름의 자기 계시를 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이견을 말하는 경우이다. 유대인의 경우는 예수님이 선지자로서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신으로서 자의식이 비로소 발생했다는 자유주의 신학적 개념도 볼 수 있다.(각주 4)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과정적 입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적 접근에 대하여서 반대할 수 있는 인과적 매력적 합리성의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각주 5)과 또한 여러 학문적 기술의 풍요를 말해줄 수 있는 것과 같은 보편성이 재고될 수 있고 또한 메시아도 그의 인식도 과정적 산물이라는 개념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목적적이냐, 인과적 합리성으로서의 존재이냐는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실존으로서, 배타적이라는 개념의 판단까지 받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논의 범주적 모순이라는 것도 재고해야 할 것으로 본다. 물론 배타적이라는 개념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그 상관성도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관성의 사실을 그 실제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도 다시 사유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볼 때, 그들의 사유의 미숙도 재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론과 실재론 이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는 말이 있다. 초기 구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언급을 철학적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에 반대되는 가운데서, 유명론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름뿐이다는 것이다. 유명론은 튀빙겐의 설립자에게서 볼 수 있고, 마틴 루터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유명론적입장이라는 구교의 실재론적 입장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실재론에 대한 명확한 것은 후에 숙제로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명유실(有名有實)을 말하고 있다,(각주 6)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의 실제적 객관적 근거지움의 핵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에 대하여서

신학의 향방을 생각한다. 교회사에서 합리성에서 당위성을 말할 수 있기를 원했고 그것은 변증적 입장을 취하게 되며 헬라적 합리성의 차용이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재론을 말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기 원하지 않는 이들은 그냥 존재론으로서의 모습을 말하고 형이상학적 개념을 통해 표현하기를 원해왔다.

신존재증명과 같은 개념들, 신학적 개념과 철학적 개념을 나누어서 변명하는 경우도 있고, 합목적적 합리성에 대하여서 인과적 개념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그 인과라는 과정적 개념의 신학적 개념과 진화적 개념의 상관성을 말하는 경우, 이 합리성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찾아왔다.

그러나 합리성 그 자체는 비로소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말할 수 없는데, 그 합리성의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마음에 둘 때에 그 고통의 끝을 말할 수 있고 핑계치 못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될 것으로 말을 맺는다.

이제는 당분간 신학의 향방은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으로 교회사와 신학의 재구성이 요청되며 신학의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야 함을 마음에 두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언어적 전회, 진화론적 입장, 기타 과정신학적 입장의 인식과 존재에 대하여서는 합리적 근거지음의 객관성은 주장할 수 있어도 그것의 타당성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범주적 오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납득 당위성의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들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두며, 아울러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유명론은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 자체임을 기억하고, 합목적성과 인과성과 같은 범주로 분리하여서 상대적 당위성을 찾기 보다는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본래적 정당함과 납득 당위성의 본래적 정당함을 의지하여야 함이 신앙인의 본래적 모습과 사유의 실제임을 말해둔다.























각주1) '예수 철학'이라는 가톨릭 측에서의 책이 출판되어 있고,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에서는 존 티한의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라는 책이 출간되어 있다. 기독교 측에서도 어떤 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의 문제점이라는 식의 주제의 글을 쓴 책이 있다. 즉 하나님이란 표현이 합목적적으로는 하느님이란 말보다는 맞지 않다는 식이다. 본 나의 글은 이런 입장들에 대하여서 간단한 입장 정리와 또한 사유의 향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정 짓도록 하겠다.


각주 2) 언어적 전회라고 할 때, 분석철학적 언어로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적 개념의 철학적 탐구의 입장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원자와 같은 핵심 요소의 단어들이 바르게 배열되어서 문장이 형성되고 그것이 실재를 그려내는 놀이에 비교되는 것이 이후에는 합목적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측면의 터닝적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는 점과 그 앞서 유일신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삼위일체를 의식하는 엘로힘의 경우로 볼 때는 합리적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선교나 다른 사람들의 이해도를 고려하는 합목적적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느님'이라는 말이 더 요구되어진다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즉 단어의 이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합목적성이라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측면의 당위성을 따르는 것이 영미철학의 분석적 경향의 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셈족의 언어적 입장에 대하여서는 그 이름의 실재적 정당함을 실제적으로 자존적 정당함과 그 본래성을 또한 납득 당위성을 스스로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 합목적적 개념에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셈족적 개념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그야말로 철학적 형이상학을 통한 안경을 따르는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자기 모순적 비판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실제관을 이해하지 못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 3) 물론 '절대'라는 개념을 상대적으로 변함이 없는 결정론적 개념 고정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옥스퍼드 사전적 입장에서도 그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라고 할 때에 상대적으로 그런 배타적 판단의 형태적 인식의 가능성이 있으면서도 또는 실제적인 현실적 표현이 있다는 측면이, 자존의 절대자라는 자기 계시를 비로소 전적으로 묘사를 잘한 것으로 객관적 근거지움의 확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석철학적 입장에서는 언어적 표현과 접근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앞서 그 실재의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진다고 할 때에, 합리성의 굴절로 인한 모순이라는 개념의 당위성으로 인식의 전환과 실제의 현실태적 규정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합목적적이 아니라는 측면, 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이름에 대한 판단함은 가능하지만 납득 당위성이 본래적 정당함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래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정당함을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영원의 속성적 차원에서 정당함의 본래적 실재도 스스로 취하실 수 있고 또한 본래성도 스스로 취하실 수 있는 것이 자존자의 자기 신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적 한 표현을 취하셨을 때에, 왜 그러느냐 심지어 배타적이지 않은가라는 개념도 표현 가능하지만 그 가능하다는 것으로 그 본래적 당위성을 상대적 당위성으로 판단하겠다는 성립될 수 없는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정당성 타당성의 본래성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에게서 그 실재를 말할 수 있을 때, 상대적 합리적 타당성이 정당성으로서 자리잡으려 한다 해도 그 실제는 임의적인 것으로서 비로소 그 정당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잠잠하라고 하심의 말씀하심의 실제를 여기서 본다.


각주 4)마지막 메시아의 인식의 경우 즉 메시아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발전해서 자신이 메시아인 것처럼 알았다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게할더스 보스의 '예수의 자기계시'에서 여러 경우를 말하고 있다.


각주 5) G.H. 폰 리히트, 설명과 이해,서광사p.16, 각주6과 7을 참고


각주 6) 이렇게 말함은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의 내용 속에서 볼 수 있다. 풍요의 축복받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데 셈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적 축복이 하나님의 이름 신명의 유명과 만남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