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7월 25, 2008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인터넷에 대한 견해 표명에 대하여

작금의 현실에 대하여

인터넷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의식하면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겠다.(각주1) 사태이해에 있어서 정치적이면서도 문학적이면서 그리고 신앙적인 면들과 같은 여러 가지 종합적 인식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각주2) 이러한 가운데서 세계적인 문호 움베르트 에코의 발언에 즈음해서 신앙인으로서의 입장 표명도 열려져 있고 오히려 개인적인 언급이 되면서도 실제적인 우리 국가 국민의 객관성을 취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의 여론적이든, 사유의 소여에 따른 것이든, 언급하는 바는 인터넷 실명제가 사실상 필요하며 적절하고 정당하다고 하겠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이해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언급은 다분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강요적 인식이 있을 수 있는 사태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인식의 보편성이라는 시선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열려 있는 자라면 그런 사태인식의 강요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개인적인 입장표명에 대하여

글쓰는 이의 한정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 더 나아가서 진실에 대한 이해의 게임이론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각주3) 그러나 실제의식의 시선이라고 함의 차이에서 실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을 함에 있어서 그 정당함은 상대적으로도 허용되어지고 더 나아가서 인식의 요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론

인터넷에 대하여서 어떠한 정체성적인 인식이 합당하며 또한 어떠한 방향에서 그 문화적 한 요소로서 유익을 말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서 논하고자 한다.

움베르트 에코의 발언에 대하여

움베르트 에코의 인터넷에 대한 언급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이러한 움베르트의 단언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가 기호학자로서 논리학자로서 문학자로서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기호학적인 측면으로 읽는다면, 그가 뜻하는 바와 달리 해석적 기의라고 하는 것이 재미있게 여러 인식을 자극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제일 처음에 에코의 입장을 담은 글을 본 것은 서점이다. 즉 이것은 서점에서 판매라고 하는 합목적적 개념과 이익이라고 함의 파생적 입장을 고려하여 그 기표로서의 그의 언급을 읽고 재생산적인 표현을 하고 있고, 또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터넷 문화가 필요없다는 것과 같은 입장에 반감을 느낄 수 있는 기표이고, 반대로 인터넷 실명제를 옹호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문화에 대한 배격이나 제한되어질 수 있다는 것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입장의 기표로서 그의 언급을 읽을 수 있다.

글쓰는 본인은 그 여러 기표를 읽은 기의적 당위성을 말함에 있어서, 후자의 입장이면서도 좀더 재고가 필요한 언급이라고 하는 기표로서 판단함과 기의적 기표를 하는 주체로서의 에코의 입장과 인식에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과 또한 건설적인 인터넷 문화에 대한 신앙적 입장 더 나아가서 일반 문화로서의 자리매김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안을 생각하지 않은 비판에 대하여서

대안이 없는 비판은 상대적으로도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판단에서 본다면, 에코도 그 판단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간단한 인터뷰에서의 그의 실제적 기반의 입장을 분명히 전제할 필요적 당위성이 요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면 일단 비켜갈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글쓰는 자로서 에코의 입장은 부정적 개념에서 한정하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글들과 문학적 글들과 실제적 입장에서 기술되어진 객관성 있는 글들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검증이나 객관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닌 주관적 필요에 따른, 그가 볼 때, 얕은 합리적 표현들이 식상해지고 또한 그것이 현실적 객관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시간이 지난 후에 재고되어지는 사실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보편성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표현과 같이 '멍청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신앙에 대한 그의 언급에 비교하며

객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인식과 인식론적 규정의 주체의 신념에 따른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에 따라서 성립되어질 수 있는 한정적이라고 해도 실제적인 것에서 사실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대 문호 에코의 그의 인식주체로서의 학문성과 그에 파생되는 객관적 근거지움에 앞서는 그의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존중과 함께 재고되어질 수 있는 비판도 존재한다는 것이 글쓰는 본인의 입장이다.

에코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가톨릭 추기경과의 대화가 있었다(각주4)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보편이라는 개념을 신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흐지브지하게 여지를 남기는 가운데서 대화를 마치고 있다. 이것은 신의 개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서 의미를 부여할 만한 대화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보편이 신인가?, 신은 보편인가? 잘못된 신인식에 대한 개념없음이 인식의주체로서 아무데나 신의 이름을 또는 신이라는 애니미즘적 개념의 범신적 신이 진정한 신인 것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풍부한 합리적 기교와 표현들이 식상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 보편적인 것을 신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그러한 입장에서의 기의를 목적으로 하는 기표적 표현은 문제제기의 실제성을 말하도록 요청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방향성에 있어서

에코의 실제의식이라고 함에 따른 객관성에서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함과 비난적 입장을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신앙인의 입장과 더 나아가서 일반 국민으로서의 모습에서는 그것을 선히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인으로서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기에 기도하고 구별하여서 선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상식선에서도 객관성과 책임을 가진 것으로서 표현되어질 수 있다면 '멍청이'라고 규정하고 '멍청'하게 인식강요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더 나아가서 유익과 객관적인 측면을 항상 생각하여 책임있는 표현으로서 자리매김한다면 좋은 문화로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책임성을 바탕으로 하여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떳떳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실명제가 성립되는 것이 옳다는 것과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요즘에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에 관심이 모아져서 이런 언급이 나왔지만 거의 8년정도 전에도 인터넷의 실명제는 언급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객관적인 쟁점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표현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책임없는 방종적 개념의 '가면무도회'(각주5)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대 문호 에코의 지적과 같이 '멍청이'가 될 것이다. 어떤 합목적적인 효과를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공공적인 당위성이 재고되지 않는 가운데서는 여전히 '멍청이'로 비난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실제적인 대안으로서는 책임을 전제로 하는 인터넷 실명제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자유로움과 유익의 실제를 누리는 것이 좋은 것이다.



결론

우리 대한민국IT산업의 선두주자로 앞서고 있고 인터넷 영향도 선진국과 비교할 때에 가히 평가절하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기득권을 가진 나라에서 인터넷 문화를 바르게 정초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귀감이 되어질 수 있고 또한 우리 다음 세대의 건전함과 유익을 위한 앞선 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함의 선함을 말할 수 있다.

익명이라는 측면의 유익성을 전혀 배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는 개념은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자기 표현에 자기의 존재적 입장적 책임을 가진다고 할 때에 그 표현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장려되어야 할 것이지만, 속된 표현으로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객관성을 부여하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는 그 자유라는 개념은 채색되어진 이기적 편협적 주장으로서 그것을 일소함에 있어서 당연함이 요청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지는 남아서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배려는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전반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분명한 한정 안에서, 그것도 극히 제한적으로 요청되어질 뿐이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문화를 선도해가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도 책임과 그 책임 안에서 자유와 발언권이 형성되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서 좋은 문화를 선도해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중심으로 한 작가의 견해를 통해 글을 남긴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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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인터넷이 주목받게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에 지난 16대 정권의 탄생을 계기로 보여지며 현 17대 정부에 들어와서는 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견해표명이라고 함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각주2) 시대적인 측면에서 사태이해를 생각한다면 다분히 인터넷의 영향은 정치적으로만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16대 17대 정권과 상관없이 인터넷 문화 초기부터 실명제에 대한 인식은 있어 왔다는 것에서 현실을 위한 언급보다는 다른 합목적적인 사태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미 객관성을 위해 실명으로 글을 써왔던 본인으로서는 안티적 입장에서의 사람들에게 당당한 합리적 논쟁을 위해 자기 존재적 입장의 분명함을 위해 실명으로 글로 토론을 제기한 바가 있다. 신앙의 안티적 입장에서는 난색을 표한 바 있고 인터넷의 익명성이 보장되는데 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측면을 말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번 정치적 측면에서도 같은 정황적 입장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체 행동권을 행하는 경우는 기독교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국가가 관여할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질서를 따라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된다.

개인적으로, 종교와 정치에 대한 관계에서 톨레랑스 적인 입장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될때에 민족적 개념과 정치적 관계성이 있어야 했던 인식의 모순들이 교회의 일반적인 속성인 것과 같이 잘못 알아서 정치적인 것이 기독교인 것과 같이 잘못된 인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고, 진리문제가 아닌 이상 교회의 집단적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옳고 개인으로서의 성도가 정치에 부름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 정치를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며 국민으로서 기본적인 참정권을 생각할 때에 자연스러운 정치적 입장도 언급할 수있는 가운데서 참여가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각주3) 폴 벤느,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논고-김운비 이학사 pp. 147-157 참조
폴 벤느는 여기서 '역사가도 자신의 프로그램을 벗어나기 어렵다'라는 논제를 다루고 있다. 즉 글을 구성한다고 할 때에 자신도 그 구성함에 있어서 판단을 받는다는 점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래도 구성적 당위성은 인정될 수 있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에 관한 언급을 한다는 것은 사태라고 하는 현실적 입장의 판단이라고 함의 구성되어질 수 있는 여러 말들의 판단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도 정당할 뿐 아니라 일반 한 국민으로서의 언급에도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연성을 갖춘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이글을 읽은 독자의 판단에서 객관적인 판단의 인식주체라면 인정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각주4) 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의 대화- 이세욱 열린책들

각주5)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persona라는 말로 표현되어진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가면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삼위 위격에 대한 것도 하나의 측면정도로 잘못 이해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사람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보다는 가식과 꾸미는 것과 숨기는 것이 더 인격적 인간적이라는 괘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자신의 정직함을 드러내는 것이 인격이라고 함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앞서 가면쓰는 놀이로서의 '익명'은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더욱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정직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를 상관하는 그러한 실체로서의 인격적인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합당한 겸손의 실체로서의 이 말을 쓸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persona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으로 의롭다는 실체의식을 갖게 되는 성도들과 일반은총적인 측면에서의 사람들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의 의식에서도 실제화된 정직함의 사실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재가와 그에 따른 일반은총적인 사람들의 인식의 느끼게 되는 당위성에서 자기의 실재를 드러내는 진실함에서 인격을 말함을 마음에 두게된다.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맹목적 인본주의적 개념에서는 글자의 의미에서 임의적으로의 해석적 뜻함을 실제화하는데 그것은 우리 인생으로 납득 당위성을 본래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