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1월 30, 2006

도올 김용옥 선생의 종교비판에 대한 답변

서론에 가늠하며

먼저 박학다식하신 분의 글(각주1)에 대한 평가의 글을 쓰게 됨에 있어서 몇가지 양해(각주2)를 구하면서 글을 쓰도록 하겠다.

전반적인 글의 흐름과 내용에 있어서는 자신의 솔직한 배경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독자들의 심정에 다가갈 수 있는 노력과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주 전문성을 갖춘 것을 최대한 활용한 가운데서의 언급을 말하고 있고 초지일관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고 또한 그 기술이론의 대중화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는 것과 같은 표현으로 사유의 제고찰을 요구하는 정적인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글은 합리성의 선명함이라고 하는 것은 있지만 정당성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파생적 입장에서의 합리성을 재구성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즉 그의 글에는 합리성과 타당성내지 정당성에 대한 파생성과 본래성에 대한 시비없이 간단한 논지로 인용적 입장의 당위성만 따르고 있다.

한마디로 정당한 논리인지, 논리적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재고없이 논리적이면 타당성에 대한 개연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임의적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즉 정당하게 논리를 펴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위 말만 되면 정당하다고 우길 수 있는지에 대한 재고없이 논리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말만 만드는 사람이라는 판단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개인적인 유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의 타당성 시비를 위한 논쟁에서 본래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제적 입장에 충실할뿐 저자 본인의 그러한 수행적 정당함을 보이지 않고 간과하고 있다.

그러한 글에 대하여서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수행적 모순이 있다고 하여도 파생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 길들여질 수도 있는 이성들을 위해서 그러한 생을 위한 철학은 '니체도 구현하고 싶어했던'(각주3) 가치있는 일은 철학적으로도 논의의 당위성을 말할 여지가 있다.

물론 철학적 입장에서 답변한다기 보다는 신앙인으로서 신학적 입장에서 답변하는 것이다. 논점은 신학적 입장의 기술이 저자의 반론과는 다르게 정당하다는 것을 말함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서 합리성의 전개를 통한 비판적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각주4)

본론에 즈음해서

1. 저자의 합리성의 전개에 대하여서

저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그 논리적 실존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재고가 없다. 즉 합리성과 타당성이라고 하는 것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합리성과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합리성을 진행시키고 있다.

상식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항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개연적 표현에 대하여서도 열려있어야 하는데 단편적으로 합리성에 대한 언급을 주저없이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의 말의 실제성을 불어넣고 있다고 보여질 수 있는 러셀의 기술이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소위 말하는 아펠의 수행적 모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논의의 범주가 달리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재고없는 비이성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주5)

즉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의 근거로 주장하는 러셀의 기술이론'(각주7)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인식의 신인식불가능성에 대한 입장일 수 있지만 신의 사역적표현이나,신의 인식적 제한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식의 외연에 있다고 한다는 것만으로 합리적 증명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비판적 합리성까지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각주6)

그리고 버트란트 러셀에 대한 이해에서도 볼 때에 무리한 이성적 행보를 시도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은 이성적으로도 치우친 폭력을 일삼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말할 수도 있겠다.

'버틀란트 러셀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이다.'(각주8) 그렇다고 할 때에 무신론적인 입장을 말하기 위해서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을 도입한다는 자체도 엉성하며 전혀 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저자가 지적한 러셀의 희열이라고 하는 것은 무신론자로서의 자기 합리성의 완성을 비로소 말하는 것으로써 그의 사상의 입장인 불가지론에서 무신론으로써의 전환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자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의 대변인처럼 인용하고 있고 그의 권위를 빌려온다는 것은 저자의 이중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말함은 '철학자의 권위에 대하여서 그렇게 의식하지 않도록하고'(각주9) 그러한 부적절한 러셀의 권위를 인용함을 통하여서 무리한 당위성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그 확신을 과신의 자리까지 이끌어가면서 확실성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는데(각주10) 버트란트 러셀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철학적 입장에서는 어떤 중요한 것을 했을 수 있다는 개연성뿐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각주11) 이러한 것은 러셀의 기술이론에 대한 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대한 문을 열어놓고 있다 즉 그것으로 신인식의 부당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는 여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2. 저자의 언급한 내용들 중에서 몇가지

이처럼 부당한 인용과 교조주의적 권위에서 합리성의 바른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한 말들 중에서 몇가지 단정적인 입장에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1)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종교적 신앙의 강요는 있을 수 없다. 철학은 무전제의 사유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종교교육을 받으면 안된다.

답변 : 강요라고 하는 것은 합당치 못한 것을 인식하게 함이나 어떤 윤리적 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기만적으로 폭력적으로 납득 입장을 요구하게 되는 것을 전제로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핑계할 수 없는 사실성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은 강요라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합리성 자체에서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자도 인정하는 바라고 할 때에 핑계치 못할 복음에 대한 당연한 권면을 저자가 강요라고 당위성이 결여된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반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인 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전제라고 하는 것도 그 무전제라고 하는 말이 전제되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기술이론적 소거의 당위성을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당위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반박일뿐이기 때문이다. 자존자의 자기 절대적 정당함으로 그러한 모순있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면 그 합당함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위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굳어진 의견으로서의 도그마에서 함부로 규정하여 말하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나 역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모태신앙”운운하면서 자라났다. 그리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갔지마는 결코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신학대학을 나왔다. 이것은 노라가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종교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종교가 인간세에서 구태여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근원적인 선포였으며 해탈이었다.

답변 : 이런 말은 아주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동정을 구하는 동정의 당위성이 결핍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의 기술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공론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의 기초석을 비로소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자신이 말에 대한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실재론이 존재할 때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반박가능성의 부재라는 개념이 올바른 것이라는 임의적 생각에 과신한 나머지 중심을 잃었던가 아니면 아주 청중의 정적인 당위성에 갈망했던가 둘 중에 하나일 수 있음을 읽을 수 있다.

3) 내가 이런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뜻은 종교는 도그마(dogma,독단)의 체계라는 것을 청소년에게 일깨우기 위함이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믿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며, 특정한 교회에 나의 삶을 복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도그마에 나의 삶을 복속시키고 나의 사유를 제한시키며, 불가침의 절대적 명제를 삶의 목적론적 전제로 삼는다면 그 인간의 삶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답변 : 도그마(dogma)라는 말은 '도케인' 본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진다. 어쩌면 하나의 의견이 규정되어지고 굳어진 것이라는 점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당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면 단지 정형화되었다는 것만으로 인식의 자유가 없는 것과 같이 매도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의 발상이라고 하겠다. 도그마는 앵무새처럼 의미없이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양심으로 동일하게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통일성이 있는 규정적인 표현이 되어지는 자유로운 고백이다. 자유의 실제의식없이 정형화되어진 것을 거부하는 것은 정황적으로 다친 가운데서 있게 되어지는 저자의 아마도 '인식의 거식증'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3) 출 3:14절 해석

저자는 버틀란트 러셀을 이해함에 잘못을 범한 가운데서 그의 기술이론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문법의 오류라는 것을 지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각주12) 러셀은 합리적 반박가능의 부재라는 개념에서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입장(각주11참고)인데 저자는 그러한 것에 대한 개념없이 비로소 파생적 정당함을 러셀로부터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잘못 적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인식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 전에는 납득되어서는 안된다는 데카르트적인 회의적 정신'(각주13)에서 잘못 나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반박부재의 합리적 입장이 러셀의 기술이론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름과 고유명사의 문제를 살펴보자! 얼핏 보기에, 이름과 고유명사가 일치하는 것 같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시하는 단순한 기호일 뿐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184.)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는 본인은 그러한 신존재증명에서 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인식의 확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 실제와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재고없이 행해지고 있는 잘못된 중세의 신학적 입장에 맹목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서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존재증명을 할 수 없다는 증명 역시 증명의 카테고리에서 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증명에서 비롯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보다 더확실한 증거에 의한 실존적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다. 증명이라는 것과 다른 범주의 그것을 증명으로 반박부재를 말하겠다고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각주14)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파생적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올바르다고 하는 것에 길들여진 이성은 지혜롭지 못하게 증거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언어학적으로 본다고 해도, '기호'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같이 양립되어지는 것으로써 반드시 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5)

구태여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문구를 기호로 이해한다면 기의적인 실존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러셀이 기술이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술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어떠한 '묘사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는 실존적 개념이 동반된다는 것이 언어적 분석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이다.(각주16)

이러한 언어이해에 대한 부족에 따른 러셀의 입장을 잘못 신뢰하는 가운데서 저자가 실수하는 것을 본다. 즉 증명에 길들여진 이성이라고 하는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 자신도 그러한 파라독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서 틀린 상이한 동일범주의 판단을 받아야 함이 기정사실화 된다.

이러한 증명에 따른 신존재증명의 여부를 벗어나서, 그것보다도 확실한 증거적 실제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이름 그 성경해석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은 그 해석할 수 있는 다양성'(각주17) 속에서 납득의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는 방법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자존자의 하나님으로 주목할 때에 그 해석적 정당함을 또한 스스로 취한다는 측면에서 납득 정당함을 읽게 하는 가운데 성경의 증거의 사실로서 받게 되는 것이다.

4) 성경의 보편성이해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납득 합당함을 핑계치 못하게 되는 가운데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성경의 실존에 대한 보편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 종교라는 것과 일반 텍스트라는 것으로 볼 때에 한정되어지고 좀더 보편적인 모든 종교적 입장보다는 상대적으로 편협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며 가르치는 내용도 그러한 가운데서 동일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합리적 당위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의 방법을 주권적으로 절대 합당하게 선택하여서 그러한 편협한 형식속에도 자신의 절대 보편적 재가를 허락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속성적 계시로써 자증(Autopistia)하게 되는 것이며, 증명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가운데서 모순되어보이는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의 실제를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나며 그에 따른 절대 무오의 성경과 완전영감에 대한 사실을 재가되어진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실제의 진리와 사실로서 합당하게 증거되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절대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자의 재가적 보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비교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으로써 자기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경전이나 그것에 비롯된 종교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속에서 기만성의 정체성으로써 부정되어짐의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게 되는 것이다.

즉, 타 모든 종교와 그에 따른 경전 자체의 정체성을 위한 합리성은 본래성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대적 파생적 당위성에 입각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위한 변명의 합리성은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적 재가를 받지 않는 가운데서는 상대적 보편이라는 편협의 기만성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음으로 합당하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성경해석의 실존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존의 절대자가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택하신 종들의 눈을 여신다는 것은 소망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간과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다음 세대에게 실제의 개념을 임의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글쓰기를 지도한다는 것과 꼭 하나님에 대한 합당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다음 세대가 실재가 없는 알맹이 없는 임의적 말을 꾸며내는 기술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점에서 재고되어질 수 있는 윤리적 당위성이 글을 쓰게 했다.

물론 신앙적인 것이 기본적인 것이지만 신앙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뜻하심을 중세와는 다르게 합당하게 베풀어나가는 것이 성도들의 기본적인 입장임을 기억할 때에, 다음 세대들에게 이성이 건전하지 못한 이성들의 시끄러움과 비이성적 간음의 소리에 혼돈이 있을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간교한 플류우트 소리를 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

학문의 숲속을 돌아다니며 소리지르는 신 '판'의 소리는 문명화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와 일상적인 인식속에서 자연스러운 합당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과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한 모습이라고 할 때에 합당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가운데서 다음세대들의 참으로 알차고 합당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학문의 숲을 소요하는 패닉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세미한 음성으로서의 아주 평범해보이는 주 예수님 말씀하심의 소리를 듣을 수 있도록, 위해서 축복하며 글을 맺는다. 그가 설령 일시적인 숲속의 판이었을지라도 동일하게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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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70-191.) -3. 종교적 신앙은 사유의 단절 - 를 읽고

각주2) 아직 생존해계시고 또 학식과 연배에 있어서 존경을 표함이 마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술상 존칭은 생략함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술상 저자는 김용옥선생을 지칭하고 본인은 글쓴이를 지칭하기로 한다

각주3)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 105.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생철학은 그의 의지적 표현일뿐 그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래도 유용한 것으로써의 부정적인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는 한마디로 '그래도'라는 방향전환을 위한 모색적 입장이 가능한 가운데서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개연을 의미할 뿐이다.

다만 여기서 인용하는 것은 니체와 같이 사상사에 3대 악동에 대한 발판에서 너무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파생적 합리성에 대한 저자의 의지적 표명이 객관성을 잃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의의 가치적 입장을 힘써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철학자 니체의 입장에서 논의를 위한 동의를 할 뿐이라는 점에서 말을 꺼낸 것이다.

각주4) 이것은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의 기본적인 전제 즉 '3. 종교적 신앙은 사유의 단절'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 대하여서 그의 쓰는 언어와 인용의 부당함에 대한 사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본 글의 진행방식을 이룬다.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과 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의 비교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전자적 입장에서 신학적 불가해성을 비로소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물론 뒤에 언급될 러셀의 기술이론적 입장에서 그 전제적 소거라는 것으로 모순적 입장을 피해가겠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것은 신적인 재가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적 입장에서는 범주가 달리 나타나는데 상대적인 범주에서 상대적인 측면의 논리적 정당함을 비로소 주장할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각주5) 논의를 위한 입장에서 신에 대한 계시를 말할 때에는 그 특수성인 신의 계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정도는 인정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것의 전제에도 불구하고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논의의 기본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 특수성으로써의 신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 신의 보편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때에 일반 상대적인 범주와 다른 범주의 생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것없이 동일범주로서 객관성을 말한다면 이것은 객관성에 대한 기만적 모습을 취하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모독이 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저자에게 신의 보편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전제로서 의견을 개진하고 일상적인 범주적 당위성에 대한 동의가 있고 난 다음에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동의할 당위성이 성립되어지지 않지만 말이다. 형식적으로 그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 이성의 기본이 될 수 있다.

각주6)이것은 러셀도 그의 저서 '철학의 문제들'에서 의식하게 되어진 것이고 이러한 것은 앞서 칸트의 이성안의 종교라는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되어질 수도 있다고 하겠다 중세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실제적 입장의 비판할 수 없는 입장에서 칸트의 그 책을 금서목록으로만 제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에서는 그 신론적 입장의 재고찰에 따른 새로운 인식으로써의 불가해성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 불가해성과는 달리 재가되어진 사실의 실재성과 실제성에 따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각주7)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82-185.
럿셀의 기술이론

“그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는 명제에 관하여, 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는다면, 의당 우리는 “그것은 그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 우리는 마치 “그 황금산”에게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며, 그 존재하는 황금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것은 신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므로, 신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무신론적인 주장을 해도 그것은 유신론적 전제를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황금산”(The golden mountain)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지점에 순전히 황금으로만 되어 있는 어떤 산에 대한 이름(name)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서울의남산과 같은 산을 직접보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남산”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지칭과는 관련없는 논리적 구성물이며, 그것은 한정적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이 한정적 기술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특정한 대상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중략) 다시 말해서 한정기술이란 그 기술의 외연(denotation)이라고 말할수 있는 어떤 대상을 명제의 구성요소로서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기술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불완전한 심볼(incomplete symbol)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다름에 이름과 고유명사의 문제를 살펴보자! 얼핏 보기에, 이름과 고유명사가 일치하는 것 같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시하는 단순한 기호일 뿐이지, 그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민우”(民雨)는 현재 내가 매주 목요일에 만나는 중앙고 2학년 학생이며, 그 학생을 직접감각소여(sense data)를 통하여 알고 있으며, 그러한 직접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실존하는 대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로서 통용되는 어떤 발성체계이다. 그것이 “백성비”(民雨)라든가 하는 이름 지체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의미가 없는 순수한 지시심볼인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이름의 경우에는 존재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따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 민우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무의미한 명제이다. 민우는 민우일 뿐이다. 존재의 여부를 따질 이유가 없다.

직접지식과 기술지식

만약 “민우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의미있게 하려면 주부에 해당되는 말이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EBS 도올선생 철학강의를 듣는 중앙고 2학년 학생중에서 안경을 쓰고 얼굴이 통통한 그 학생은 존재한다”라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EBS,”“도올선생 철학강의,” “듣다.” “중앙고 2학년,” “학생,”“안경,”“쓰다”“얼굴,”“통통하다” 등등의 기술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모두 우리의 직접적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그 속성을 보유한 대상의 존재여부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직접적 지식에 대한 사실적 검증으로 판결ㄷ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결까지도 갈 필요가 없다. 한정기술은 논리적 구성일 뿐이며, 그 논리적 구성을 잘 분석하면 한정기술 자체가 사라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준재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발생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열렬한 사회운동가였던 버트란트 러셀경(Bertrand Russell, 1872~1970)의 기술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s)이다.

각주8) 버트란트 러셀, 종교는 필요한가 (why I am not a Christian) 범우사 p.219 부록1. 하느님의 존재 -러셀과 코플스톤 신부와의 토론-

여기서 버트란트 러셀은 분명하게 자신이 불가지론자임에 대한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증명의 한계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나는 기표의 문제는 기의를 달리한다는 기호적 입장에서 하나님이란 표현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해두는 것으로 생략한다)

각주9)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69-170.
".. 그들의 언어는 연구의 대상으로 제단 위에 모셔있을지언정, 내가 일상적으로 밥상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가 학문을 지배하면서 학문을 교조화시키고 초월화시키고 우리의 삶에서 유리시켰다. 철학사에 나오는 어떠한 인물을 접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를 같은 반에 있는 훌륭한 친구 이상으로 그를 존경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의 비범한 발상을 이해하고 나도 비범하게 되면 그뿐인 것이다. 내가 예수가 될 수 있고, 내가 콩쯔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면 안된다."

본인이 볼 때에 저자는 러셀에 대한 부당한 인용적 입장에서 그의 권위를 입어서 결론을 내리고 있고 그 러셀의 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성 시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냥 간과하면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맹목적인 권위주의적 발상의 교조적 입장을 저자 자신도 못버리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즐거워하기 원하는 자위는 저자 스스로의 두 개의 인격적인 판단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겠다.

각주10) 김용옥,논술과 철학강의1,통나무 pp.190-191.
'20세기의 분석철학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처절하게 존재론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러한 논쟁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외경의 염보다는 연민의 정이 앞선다. 우리에게는 신에 대한 이름도 없고 존재도 없고 실체도 없으며, 따라서 만물도 오온의 가합일 뿐 존재의 영역에서 그렇게 피튀기게 싸울 필요가 없다. 러셀의 기술이론을 생각하면, 서양문화가 얼마나 처절하게 종교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아직 정당성의 시비를 위한 범주적 개념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러셀의 기술이론이라고 하는 것의 불확실성의 불가지론적 입장의 한 표현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결론을 이끌고 있는 것은 러셀은 전반적인 입장에서 그의 논문발표에 있어서도 그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바꾸는 측면까지의 자기 논문에 대한 확신은 이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무신론의 대부로써의 결정적인 표현의 사실을 비로소 말한 것과 같이 기만적으로 그의 사상을 인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인용과 결론과 이해의 결핍을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각주11)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 철학논고, 이영철 천지, pp. 9-30. 버틀란트 러셀의 서문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씨의 (논리,철학논고)는 그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그것이 궁극적인 진리를 주는 것으로 증명되든 않든 그 폭과 범위와 심원성에서 확실히 철학계의 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질만 하다. (중략) .. 이러한 가설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반론들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비트겐슈타인씨의 결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보다 쉬운 가설이 있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 비록 이 매우 어려운 가설이 지지 가능한 것으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씨의 이론 중 매우 많은 부분은 -그 자신이 가장 강조하고 싶어하는 부분은 혹시 아닐지 몰라도-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논리학의 난점들 및 반박 불가능해 보이는 이론들의 기만성을 오랫동안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어떤 이론이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는 근거만으로 그 이론의 올바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도 명백하게 잘못되어 있지 않은 어떤 논리 이론을 구성해 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중요한 작업을 성취해 낸 것이다. 내 의견으로는, 이러한 장점이 비트겐슈타인씨의 책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책을 진지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 1922년 5월 버트란트 러셀-

본 책의 역자 이영철씨는 1951년 4월29일 죽은, 금세기의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고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한 자에게 정작 버트란트 러셀은 반박불가능이라는 합리성 자체에서 올바름이라는 정당성이 비로소 나온다는 것에 대하여서 회의적인 가운데서 상식적인 측면의 정당함에서만 중요성의 현실적 인식의 재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러셀의 솔직한 모습이 개인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러셀의 입장에서 본다면 러셀의 기술이론의 소개에서 상대적 반박불가능에 대한 인식에서 올바른 것이 비로소 있는 것과 같이 이성적 당위성을 부풀리고 있는 저자 김용옥 선생은 러셀에 대하여서 이해도 결핍되어지고 단지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부당하게 인용하여서 과신하고 있다.. 저자 자기 이성의 기만성으로 보여질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각주12)
(중략)..이러한 기술이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적 미신에 쩔어있는 서구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러셀의 고육지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신은 존재한다”라는 말 자체가 엉터리 문법(syntax)에서 발생한 엉터리 명제라는 것이다. 우선 신은 민우나 도올과 같은 이름(name)일 수가 없다. 아무도 저기 저 우뚝 서있는 남산을 쳐다보고 지칭하듯이 신

을 이름으로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호렙산 떨기 나무 불꽃에서 신을 만났다고 하는 모세에게도 신은 자기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모세가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터인데 그러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도 신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나는 나인 자이다”
“I am who I am”(RSV)
“I am that I am”(King James)

결국 신도 “나는 나일 뿐이다”라는 식의 토톨로지(tautology,항진명제)로서 대답했을 뿐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적이고도 신화적인 한 장면의 언어적 묘사에 불과한 것이지만, 신은 근원적으로 존재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재를 말하려면 신은 반드시 기술되어야 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구문론적 오류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낸 그 무엇, ” “전지전능한 그 무엇,” “시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만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인격적인 그 무엇,” “사랑의 화신인 지고의 그 무엇”등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그것이 일단 기술되면 그 기술구는 정확한 구문론적 분석에 의하여 소거될수 있으므로 그 기술의 대상인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사라지게 죌 것이다. 존재는 근원적으로 속성의 문제일 수가 없다. “신은 완전하다.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는 식의 유명한 안젤므스(Anselmus, 1033~1109)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ontologischer ßeweis)이 오늘까지도 당연한 통설처럼 받아지고 있는 서구전통 속에서는 러셀의 반기는 매우 혁명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른다. “신은 완전하다”는 삼단논법의 대전제 자체가 전혀 무의미한 말장난의 나열일 뿐이다. 더군다나 완전성 속에 존재성이 포함된다고 하는 존리 자체가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존재성이 어떤 사물의 속성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것은 노랗고 빨갛고 하는 따위의 속성적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존재한다. 도올은 사람이다. 고로 도올은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으로써 도올의 존재성을 입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주13)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I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pp. 420-421.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은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어느 것이든지 진리라고 분명하게 증명되지 않았으면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 둘째 연구과정에서 만나게 된 어려움은 분석하고 나눔으로써 여러 각도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할 것 셋째, 자신의 사상은 가장 간략한 것부터 가장 복잡한 순서로 질서있게 배열할 것, 넷째, 모든 것을 낱낱이 열거함으로써 빠진 것이 없도록 할 것, 그렇지만 이상 언급한 4가지 요점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수학적 지식보다는 더 확실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수학적 지식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경험적 관찰에서 유래되지 않고 이성의 본질 그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수학적 지식은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이 없이도 진리일 수 있다. 반면에 경험적 지식은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

이성적 증명되기전에는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것이라는 말은 그 납득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의 파생적 정당함에 비로소 두려고 한 것으로 중세에 이성적 종교의 잘못된 모습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볼 때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합리성 외에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정당성에 따른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구교적 또는 중세적 교회의 철학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박이 결국은 동일한 합리성이라는 자체적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의 회의적 이성이라고 하는 판단을 받게 된다고 하겠다. 물론 동일하게 같이 부정된 범주에 있는 부정되어진 다양성속에 한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14) 증명증거라고 하는 것은 그 실존적 범주가 다르다 물론 상관관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며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외연에서 실존을 말할 필요와 가치까지 없다는 가운데서 증거라는 개념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 증거의 범위가 이성이 외연이라고 하는 판단 범위에만 국한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외연의 연장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경계가 있는 다른 영역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외연이 증거의 모든 영역과 범주를 비로소 주장하는 것과 같이 기만하여서 실재를 말할 수 없고 다만 의미없는 실제없는 비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편협된 범주이해에 따른 기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증거라고 하는 것은 증명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 개념과 범주안에서 존재하게 되는 실재로서의 실제적 사실제시로써 증명보다는 하나님의 실제적 자기계시를 더 온전히 나타내게 된다고 하겠다. 범주적으로 볼 때, 증거는 증명을 주장할 수 있지만 증명은 증거를 비로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확실성을 증명에 따른 납득이라는 개념의 파생적 정당함을 데카르트와 같이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진 이성은 자유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즉 저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판단하에 있다고 하겠다.

각주15) 코블리, 기호학, 리챠잔츠그림/조성택, 변진경 옮김 김성도 감수, 김영사. p14;15;17.
"소쉬르는 언어 기호가 양면적인 실체 즉 이원적 구조를 갖는다고 정의했다. 기호의 한면을 기표(signifier)라고 하는데, 기표는 기호에서 전적으로 물리적인 측면이다. (중략) 소쉬르에게 있어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signified)로 구성되어 있다. 기의는 한 기호안에 기표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없으며, 또한 기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의는 정신적 개념이다.(중략)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으로 결합한다고 역설했다. 이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은 소쉬르의 언어 기호론에서 핵심을 이룬다"

이후에 기호학의 발전에서 인식하는 자의 입장까지 고려되어지는 것으로 발전되어진다 이런 가운데서 인식자의 인식부재나 또는 인식할 수 없음에 대한 것 또는 하나 인식할 수 있는 것 또는 여럿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부재라는 그 자체까지도 인식의 특별한 형태로 볼 때에는 그 확실성의 정도에 사실을 임의적으로 말하게 된다고 하여도 기의는 분명이 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기호를 이야기 하면서 그 기의로서 존재하게 되어지는 실존에 대한 것은 부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모습은 기호에 대한 임의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호라는 것에 실존의 부재를 말하는 유명론적인 이해로 해석하기를 마음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유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의 부재로 비로소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만은 없다는 것은 저자가 알아야 할 것이다.

각주16) 형용적 규정 즉 빨갛다 노랗다 이러한 것은 어떠하다는 동사적 개념과 상관성을 가지게 된다.즉 규정이라는 개념이 동일한 범주적 사실을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언어로는 규정과 존재가 나뉘어지고 있다. 즉 '이다'와 '있다'는 동일하게 표현되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의 인식을 표현하는 언어는 다르다. 즉 영어의 be동사 독일어의 sein 동사, 그리고 히브리어에서의 '하야'동사는 모두 '이다'와 '있다'라는 말이 같이 언급되어진다. 즉 규정과 존재의 동일범주적 입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하야동사가 쓰인 '스스로 있다'라는 개념은 그냥 나는 나인 자이다” “I am who I am”(RSV) “I am that I am”(King James)라고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스스로 존재하심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하게 되는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주권적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읽도록 하시는 것이다.

저자 도올 김용옥선생은 러셀에 대한 이해에 부족과 함께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못하게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서 성경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17)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