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것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있고 그의 철학과 같은 학문의 깊이를 나타낸 택스트를 말할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의 의미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와 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와 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